마음숲밭

인정 욕구

이춘아 2021. 7. 13. 12:57

2021.7.13 화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일어나 거실에서 몸풀기 운동을 했다. 눈뜨자마자 하는 것이 역시 좋다. 아침은 단호박을 삶아 전지분유를 넣어 스프를 끓였다. 저지방우유로 하는 것보다 풍미가 좋다. 지방의 맛일 것이다. 참치와 샐러리와 마요네즈겨자소스 등을 넣어 샐러드를 만들었다. 어제 남은 삶은 계란도 있고, 단호박과 고구마도 구웠다. 먹을 것이 풍성하다. 천고마비 시절이 오기 전에 살이 찔 것 같다. 식사, 설겆이, 청소를 마치고 나니 10시 45분이 넘었다. 

[동의보감]에서 읽은 인정 욕구를 주제로 글쓰기를 해보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에피소드는 초등학교4학년 무렵의 건이다. 

에피소드 1)
나는 간호원언니와 일하는 언니들과 함께 방을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언니들이 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언니들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엄마에게 말한 적이 없다. 언니들은 엄마에게 나를 칭찬했다. “춘아가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를 사모님에게 전달하지 않는 것 같다고, 입이 무거운 아이”라고. 엄마도 대견해했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뭐 그런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더더욱 언니들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고, 간호원 언니 연애편지를 상대방 남자에게 전해주는 역할까지 했다. 언니들은 목욕갈 때 나를 데리고 가서는 여러명이 달려들어 나를 때밀어 주고는 놀게 해주었다. 언니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언니들로부터의 이러한 인정은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여러번 들었던 것 같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언니들이든 친구들이든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전달해서 화를 자초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입이 무거운 아이’는 나의 정체성 중 하나로 가져왔던 것 같다. 

에피소드 2) 
초등 고학년 무렵에 시골친구들과 사진을 찍으러 갔다. 그때가 겨울이었는지 목도리를 감싸고 사진관 사진을 찍었다. 그 이후 눈이 거의 오지 않는 부산에  갑자기 눈이 왔을 때 친구들과 만나 학교로 사진찍으러 갔다. 방학 때 였지만 교복을 입고 갔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때 과외하러 가면 예쁜 옷을 입고 온 아이들이 있었다. 부잣집 아이였던 것 같다. 그때 나도 사복을 입었는지 교복을 입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우리집 형편이 내가 옷을 사달라고 하면 안사줄 집은 아니었지만 옷 사달라고 한 적은 딱 한번. 엘비스 프레슬리의 나팔바지가 유행할 때 땅딸한 중학교 1학년생인 내가 나팔바지를 맞춰달라해서 입었던 기억 외에는 없다. 또 하나는 중학교 2학년인지 나도 가슴이 좀 나오고 큰 아이들은 브라자를 하고 다녔다. 나도 그게 입고 싶어 엄마가 큰 시장 가실 때 따라 갔다. 국제시장이었던 것 같다. 이층 건물과 건물 사이에 다리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없는 다리에서 엄마에게 사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몇 번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말을 못꺼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자랑삼아 말했다. “춘아는 옷사달라고 하지 않고 사주는 옷만 입는다”고 했다. 옷 욕심이 없고 수수하다는 표현이었다. 사춘기 시절 멋부리고 싶어할 때도 옷 사입는 것은 귀찮게 여겼다. 매일 하나로 입고 다닐 수 있는 교복이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얼마전 이불을 꿰매고 할 때 나의 바느질 실력은 단연코 교복치맛단 꿰맬 때 생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개구진 사춘기 소녀는 늘 치맛단이 뜯어져 핀으로 고정하고 다녔다가 어느날 날을 잡아 단을 꿰매곤 했다. 교복치마는 주름치마여서 펼치면 폭이 긴 편인데 달려있는 핀을 보면서 이래서 치마가 무거웠구나 생각하곤 했다. 교복치마의 주름은 부모님 이부자리 아래에 깔아놓고 자면 다린 것 같았다. 내가 자는 요 아래 깔았다가는 엉망으로 구겨져 있어 부모님 요 아래에 깔곤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총6년의 교복 치마 단 꿰매던 실력이 이렇게 발휘되는 것이라는 결론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인정욕구는 ‘저 아이는 옷으로 멋부리는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대학교 들어와 할 수 없이 옷을 사곤 했지만 교복같은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에피소드 3) 
중학교 때인 것 같다. 아이큐 검사 결과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평균보다 높았던 것 같았다. 내가 학교 점수는 좋지 않았지만, 아이큐가 높은 편이라 언제든지 공부하려고 마음먹으면 못할 건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돈이 없어 뭘 못사는 게 아니다, 라는 것과 공부하기 싫어 그렇지 마음먹으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 는 망상을 가지고 살았다. 그래서 나는 크게 누구를 시샘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을 좋아해서 그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싶었는지 수학 전교 1등을 해버렸다. 속으로 ‘그것봐 나도 하려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인정받으려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쓸데 없는 대학'은 가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부산에 내려온 연극 ‘태’를 보고 저런 연극이 서울서는 맨날 있다고 하니 나도 서울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서울가려면 대학가야하는 것으로 결론 짓고 그 때부터 입시공부를 했다. 그 전에는 음악 듣고 책 보고 하는 것이 공부이지 ‘그따위 입시공부’는 내가 할 게 못된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가려고 하니 여러 과목을 잘 해야하는데 ‘외우는 건’ 내 창의력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어서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때 나름 공부의 기준이 있었던 것 같다. 

 영어 공부는 레코드판(그때만 해도 영어 해적판을 찍어낼 때여서) 표지의 영어를 번역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레코드판 뒷면의 영어해설을 읽기 위한 것이었고, 성문종합영어 같은 참고서로 학원에서 수강할 때 문학에서 인용된 문장들이어서 추론하면서 번역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문법은 잘 못하지만 단어를 나름 많이 알고 번역은 그런데로 꿰맞출 수 있었다. 하나하나 물어보면 잘 모르는데 전체 맥락 파악은 빨랐던 것 같다. 그건 순전히 내가 소설 등을 많이 읽어서였던데 있다. 문법 정도는 몰라도 괜찮다고 스스로 다둑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오빠가 ‘너 영어를 독일어처럼 읽는다’ 라고 하여 마치 영어 뿐 아니라 독일어도 잘 할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내 가방에는 국어사전 영어사전 (노란색 표지의) 불어사전, 그리고 옥편까지 넣어다녔다. 영어사전은 오빠가 함부로 페이지를 넘기며 보다보니 구겨진 걸 다리미로 펴서 내 사전으로 만들었다. 당시 오빠는 어디서 속독법을 배워서 눈을 한곳에 고정하고 사전을 넘기며 보았다. 그런 방식으로 사전을 통채로 여러번 보았다. 구겨진 사전은 버리고 새사전을 사서 보곤 했다. 휙휙 넘긴 얇은 사전종이는 엉망으로 구겨졌는데 나는 그걸 다려서 내 사전으로 만들었다. 당시 오빠의 공부방법이 괜찮다고 생각은 했지만 몇번 시도하다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때 한창 소설 책 등에 재미를 붙여 밤늦게 읽다가 아침에 학교 가기 싫어 아버지에게 학교에 가는 것보다 이 책을 마저 읽는게 좋겠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그래라’ 라고 말해주셔서 그날 학교 가지 않고 소설 읽었다. 아버지는 나를 알아주었다고 생각했다. 문학책 좀 읽는 나는 남들이 들고 다니지 않는 옥편까지 넣어다니며 필요할 때 찾아서 보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이 다할 ‘진 盡‘을 틀리게 칠판에 쓰셨다. 내가 지적했다. 선생님은 당신이 틀렸다면 반에 과자를 돌리겠다고 했다. 선생님과 내기에서 내가 이겼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스스로에 대한 인정을 하나 더 보태준 사건이었다.  참 별것 아닌거 같은데 사람은 이러한 인정욕구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만들어가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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