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16 월
상사화 필 무렵
경주 기림사 가는 길에 무슨 향기가 이리 날까 둘러보았다. 짙은 보랏빛 꽃에서 아주 좋은 향기가 났었다. 칡꽃의 향이라 하였다. 칡향이 나는 무렵이면 경주 기림사에 가고 싶어진다. 금산에서 텃밭하며 정착한지 십 여년 되었다. 제일 지긋지긋한 풀이 칡이었다. 엄청난 생명력을 가진 칡순이 넘실거리며 텃밭으로 손을 뻗어 고추 등 각종 채소류의 목을 죄어버렸고 길 쪽으로도 넘어왔다. 낫으로 칡순을 잘라낸 날은 털들이 몸에 붙어 가려웠다. 풀독인듯 했다.
올해는 처서가 8월23일, 백중이 8월22일이다. 백중날인 음력7월15일은 ‘호미씻이’라고 하여 농촌의 축제였다고 한다. 음력 7월15일이면 풀뽑을 일도 별로 없어 호미질을 그만 해도 되는 계절이 왔음을 알렸다. 텃밭하면서 ‘호미씻이’ 날을 기다려왔지만 막상 그 날이 되어도 칡은 여전히 기세 등등하였고 모기 혀가 꼬부라진다는 처서가 지나도 모기는 여전히 무서웠다.
오늘 산책을 갔었다. 확실히 여름이 가고 있구나 느낄 수 있었다. 매년 그 자리에 이 시기에 우뚝 솓아나는 상사화가 피어 있다. 상사화라는 꽃을 처음 알게된 때가 2001년이다. 동춘당 뒤곁에 상사화가 있었다. 송준길 선생이 거처한 동춘당 담 안은 그 흔한 풀한포기 없는 정갈한 곳인데 안채로 가는 뒷문쪽으로 유독 그 꽃이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희안하게 이파리없이 꽃대에 꽃만있는 고고한 꽃이라 물어보니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고 서로 그리워하는 상사화라 하였다. 그 꽃이 보석사 앞 퇴락한 민가의 담 아래에도 피어 있다.
논에는 벼꽃 반 벼이삭 반이었다. 어느 시인은 벼꽃에서 밥 냄새가 났다고 했는데 그 냄새까지는 못느꼈다. 칡향이 짙어지는 시점은 여름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린다. 고추도 빨갛게 익어 볕에 말리고, 애호박, 오이, 토마토도 끝났다. 이제 복숭아도 끝나가고 포도철이 되었다.
늦여름 나는 이사준비를 하고 있다. 2001년 1월 대전 이사와서 20년 묵은 짐을 정리하고 있다. 짐의절반 이상은 쓰레기로 버려질 것들이다. 복사물, 팜플렛, 잡지류는 거의 버려질것이다. 다시 보려고 밀쳐둔 것들이 묵어있다. 보지도 않을 것을 뭐 이리 쯔쯔 하면서도 뭘 하나라도 더 보려고 알려고 했던 의지가 있었음이 대견하다.
뜯지도 않고 24년간 잠자고 있었던 박스가 있었다. 내 나이 30~40대 흔적들인 사진첩과 수첩, 문구류가 들어있는 박스였다. 나이가 들면 얼굴의 선과 음영이 흐려진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시절의 모습은 힘겨워 보이지만 반짝임이 있어 보였다. 현재의 나는 그 시절만큼 미래에 대한 설레임도 불안도 없이 평온하지만 그 시절의 반짝임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질투를 느낀다.
그 어느 시절로도 되돌아가고 싶은 적은 단한번도 없었는데, 웬 질투?
내 손때 묻은 것들이 이제는 다시는 보게되지 않을지라도 쓰레기로 처리되는 것은 싫다. 싫지만 결국 미련없이 버리게되긴 할것이다. 죽을 때가 되어도 명줄을 놓지 못하는 사람처럼 되고 싶지는 않은데 아마도 쓰레기처럼 잊혀지거나 버려지길 두려워하는 심정과 같은 것은 아닐까.
버리는만큼 새로워진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다고 할지라도 쉽게 버리고 싶지는 않다. 2021년 신종변형 코로나로 난리인 시간에 내 삶의 흔적들과 이별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장송행진곡이라도 들으면서 짐을 폐기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