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내 인생의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이춘아 2021. 11. 20. 08:15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도서출판 어크로스, 2018.

내 인생의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네덜란드의 영화 한 편이 동아시아의 고단한 삶 속으로 들어왔다. 마를린 고리스 감독의 [안토니아스 라인]. 이 영화는 무엇보다 대안에 관한 영화다.

어느 날 안토니아는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영화에서 떠나는 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허공에의 질주](1988)에서 리버 피닉스, [졸업](1967)에서의 더스틴 호프만, 고향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정복자 펠레’…… 어찌된 영문인지 영화는 그들의 이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끝나지만, 우리가 그들의 그날 이후에 대해서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마도 세상을 만났을 것이고, 그 세상의 비루한 일부가 되었거나, 아니면 …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다. 안토니아는 돌아온다. 그 전쟁의 폐허를 딛고 저렇게 딸의 손을 잡고 당당히 돌아오는 이를 이제껏 영화에서 본 적이 없었다. 안토니아가 떠돈 그 20년 동안에는 전쟁이 있었고, 귀향은 곧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해보고자 하는 대안적 움직임을 표상한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그 모든 신산함을 겪어내고 돌아온 자의 이야기다.

마를린 고리스는 그다지 길다고 할 수 없는 한 편의 영화 속에 대안적인 삶을 제시하고자 몇 가지 방법을 선택했다. 먼저 죽음을 앞둔 안토니아의 회고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안토니아의 일생에 대한 보고인 동시에 안토니아로부터 시작되는 ‘신인간’들의 계보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신약에서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가계의 서술만큼이나 장중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계보적 레토릭은 인간의 역사를 새로 쓰고자 하는 욕망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담대한 욕망은 많은 인간들의 이야기와 누대에 걸친 역사성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영화에서 빈번이 쓰이는 내레이션은 영화 내의 시간을 통제하며 4대에 걸친 - 안토니아의 어머니까지 포함한다면 5대에 걸친 - 유장한 가족사를 단 한 편의 영화 속에 담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크게 서너 가지로 유형화해볼 수 있다. 악으로 표상되는 핍박하는 자들, 그리고 핍박받고 소외된 자들, 그리고 그 너머의 굽은 손가락과 안토니아네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안토니아스 라인]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독해하는데, 그러한 독법을 따를 경우, 이 영화의 인물군 중에서 농부 댄 일가는 전형적으로 남성 위주의 질서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폭력과 강제의 원리가 지배하는 그 세계의 희생자인 디디는 안토니아네 사람들에 의해 구조된다. 댄-피트 라인의 세계와 안토니아 라인간의 갈등은, 안토니아가 돌아와 처음으로 카페에서 마주쳤을 때, “여전히 못생기고, 성질이 더럽군” 하는 댄의 일갈로부터 시작되어, 댄의 아들 피트가 안토니아의 손녀 테레사를 강간하는 데 이르러 극점에 달한다. 이때 가하는 안토니아의 응징 역시 비남성적 세계의 그것이다. 이 밖에도 이 영화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안토니아네 가계가 기존의 안간사와는 달리 여성 중심의 역사가 된다는 것은 물론 시사적이다. 안토니아네는 기꺼이 아비 모를 자식을 낳으며, 안토니아 스스로 아들과 남편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농부 바스의 질문에 그런 것이 왜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정작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러한 여성주의적 요소를 여느 유사한 경우에서보다 아주 심오한 지점으로부터 확보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명시적인 남성적 악과 대결하는 에피소드에서보다는 안토니아의 세계관과 굽은 손가락의 세계관이 변별력을 가지게 되는 지점에서 확인될 것이다.

그 밖에 영화에서 가해자들에 속하는 인물군들로는 경직되고 위선적인 신앙에 사로잡혀 있는 성직자들이 있다. 위선에 찬 마을의 신부에 관한 에피소드, 교회에서 가르치는 죽음의행복을 떠나 삶의 행복을 찾아가는 신부. 그는 세속의 욕망을 긍정하여 환속한 끝에 임신쟁이 레타와 결혼한다. 그리고 가톨릭의 계율 때문에 아래층에 사는 신교도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보름달이 뜨면 늑대 울음을 울다 죽고 마는 미친 마돈나 이야기. 이 에피소드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삶을 제약해온 종교적 요소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주류로부터 핍박받는 많은 방외자들이 나온다. 이들은 앞서 거론한 가해자들의 대척점에 서 있다. 댄-피트네서 고통받는 디디, 아이들에게마저 늘 당하고 사는 마을 삼룡이 루니 립스, 마을에서 20년 동안 살고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홀아비 농부 바스, 기꺼이 아비 없는 자식을 만들며 나중에는 동성애자가 되는 다니엘라…. 이들은 모두 안토니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의 진경을 맛보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안토니아네의 그 너른 앞마당의 회식자리로 초대된다.

이와 같은 인물군들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긴 했지만, 악을 상징하는 무리들과, 그로부터 핍박받고 주류질서로부터 밀려난 무리들로 대별되는 대칭적 구도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영화를 기존의 것들과는 다른 것으로 만드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들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그것은 굽은 손가락과 안토니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