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화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다

이춘아 2021. 12. 18. 07:14

노성두, [10대를 위한 서양미술사], 도서출판 다른, 2016

화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다


미술은 표현의 역사입니다. 문학과 종교와 역사로 인류가 일궈 낸 기억의 도서관은 모두 삶의 표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단테와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은 화가와 조각가에게 어떤 영감을 선물했을까요? 종교전쟁과 시민혁명은 예술에 어떤 교훈을 남겼을까요? 거장이 혼을 쏟아 부어 남긴 작품은 우리에게 흥미롭고도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이 열쇠를 들고 역사의 비밀스러운 자물쇠 앞에 서 있습니다. 문 뒤에 펼쳐질 풍경이 궁금하네요. 

미술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일상과 관심사와 그들의 영혼이 추구했던 가치를 보여 주지요. 마법의 양탄자처럼 시공의 차원을 넘나들며 멀고 가까운 역사의 현장을 펼쳐 보입니다. 

가령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다리우스 3세의 유명한 전쟁 이야기, 에덴 동산에서 교활한 뱀에게 사과를 받아 든 아담과 하와의 난감한 순간, 못된 괴물과 도적을 때려잡는 헤라클레스의 통쾌한 활약, 과일 바구니 사이로 스며드는 도마뱀과 꽃잎에 맺힌 이슬을 놓치지 않는 화가의 정교한 시선을 생각해 보세요. 위대한 발명과 대항해의 모험을 기록하고 증언하며, 철학과 신학과 문학과 역사와 사상을 가로지르고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며 모든 기록을 붓과 끌의 흔적으로 남긴 예술가들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세상은 어땠을까요. 마치 창문 없는 방처럼 답답하고 지루하지 않았을까요. 

미술의 역사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공감하며 머리를 끄덕이는 학문입니다. 나의 눈과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서 사물과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지요.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을 구분하고 또 넓히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지적인 즐거움을 줍니다.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의 주교 아우그스티누스는 일찍이 미술이 세 가지 점에서 좋다고 말했습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면 눈과 마음이 즐겁고, 배움을 얻고, 또 감동받게 된다고요. 

그런데 이런 미술작품은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일까요? 우리는 미술관에서 작품에만 눈이 팔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게 아닐까요. 그림은 사진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한순간에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가령 화가는 빈 공간을 채우면서 작품을 제작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선으로 시작해서 차츰 화면을 채워 나가지요. 최초의 색을 고르고 또 다른 색을 더하기까지 화가는 수백 번 수천 번 고민을 거듭합니다. 무수한 가능성이 떠올랐다가 사라지지요. 색의 농담과 배색, 균형과 조화를 생각하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을 그리고 또 지우기를 수없이 되풀이합니다. 올바른 선 그리고 단 하나의 색채를 고르기 위해 붓을 쥐고 캔버스를 노려보는 화가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은 아름다운 음을 빚기 위한 연주자의 고통스러운 연습 과정에 못지않습니다. 이런 창조의 고통은 조각가나 건축가도 똑같이 겪습니다. 우리는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창조의 과정에 대해서 너무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이 책은 미술작품의 미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작품의 탄생 배경과 작가들의 노고를 같이 다뤘습니다. 예술가들은 시대와 역사의 요구에 타협하거나 맞서면서 미술의 길을 걸어갑니다. 때로는 변덕스러운 주문자의 입맛에 맞장구를 쳐야 하거나 종교적인 입장을 강요받기도 합니다. 미술이 권력자의 주장을 알리거나 귀족의 부유함과 박식함을 뽐내는데 쓰일 때도 있습니다. 궁정의 초상화가는 군주나 그 가족의 초상을 그리면서 생긴 그대로 그리지 말고 얼굴을 아름답게 고쳐 달라고 요구받기 십상이었지요. 

얼토당토않은 요구와 제약에도 예술가는 자신의 표현 영역을 확장하고 상상력과 독창성을 위한 토대를 다져 나갑니다. 감동적인 명작 뒤에는 반드시 창작자의 땀과 수고와 끊이지 않는 노력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