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파사람들과 그들의 문화
2001년 7월 18일
이춘아
제헌절날 동인들과 '기호학파사람과 그들의 문화'라는 주제로 답사를 갔습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하고 있는 윤증 고택을 보고 바로 그 옆자리에 있는 '노성향교'로 갔습니다. 향교대문 앞에서 함께 갔던 우리집 아이가 나에게 귓속말을 합니다. 다른 나라사람들은 한참 과학문명을 발전시켜나가던 시절 우리 선조들은 공자, 맹자 하며 당파싸움만 하여 나라를 이렇게 만들지않았냐, 하며 목메이는 소리를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잘 알지도 못하고 그런 말을 내뱉는 아이가 밉살스럽기까지 했지만 적절한 해명을 찾지 못했습니다.
나역시 그러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 교과서와 선생님이 전해주는 단편적인 단어나열의 상식만으로 정해놓은 틀 위에서 시큰둥했던 개인의 국사관으로 해서 스스로 역사를 왜곡시켜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삼십년 넘게 차이가 나는 아이의 세대에도 여전히 그 틀이 전수되어 왔다고 봅니다. 애국도 아닌 그야말로 어설프고도 주제넘은 시국관입니다.
노성향교를 보고 백제 계백장군묘를 들린 다음 논산시 연산에 있는 돈암서원, 개태사, 그리고 대전중심을 흐르는 갑천 상류를 따라 대전시내로 들어오는 것으로 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뿌듯한 답사를 마치고 왔음에도 여전히 노성향교 대문앞에서 아이가 했던 말이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이념의 갈림과 당쟁파벌의 산실이었던 향교와 서원에 대해 좀더 알아보아야겠길래 자료를 뒤적여봅니다.
향교는 국립학교이고 서원은 사립학교 정도로 알고 있던 수준에서 자료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향교는 서원에 비해 그 역사가 고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 조선시대의 국민윤리를 향교라는 교육기구를 통해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하였으나 현실적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실제로 강학(교육) 능력을 상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설학교인 서원으로 옮기게 됩니다. 조선중기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 향촌자치운영기구로서 기능을 하게된 서원은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유학의 거두들과 추종자들이 운집하는 장소가 됩니다.
답사를 갔던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이 400여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던 곳이며, 그곳에서 호서사림의 중추인물이었던 권시, 송준길, 송시열, 송규렴, 권이진 등의 문인들이 배출되었고 김장생의 정계진출로 문인 35명이 대거 정계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은 의리로 유명했던 도학자인 송시열은 결국 당쟁으로 83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게됩니다.
막연히 나라를 썩게 만들었다고 알고 있었던 사색당쟁의 근원은 치국의 이념노선에서 엇갈린 것이며 그 이념의 한가운데서 죽음까지 불사했던 강직한 철학에 섬짓해지면서 요즘은 이러한 정신이 너무 부족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용옥선생의 텔레비전 강의가 전세대에 걸쳐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념도 없고 철학도 없고 그렇다고 노선도 없는 오늘의 정치가들과 관료들에 식상하여 다시 유교에서 신선한 그 무엇을 찾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여겨집니다.
돈암서원에서 송시열과 함께 공부했던 동춘당 송준길 선생은 김장생, 김집으로부터 적통을 이어받고 있다합니다. 그에 관한 글이 저의 마음을 끌기에 옮겨봅니다.
동춘당은 '심'을 핵심논거로 하여 자신의 심성론을 전개하여 이를 바탕으로 하여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공부를 강조하였다. 그의 공부란 주경적 사상체계로 동춘당의 경의 개념은 그의 수양론에서 가장 중요한 규준이요, 가치의 근거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가 "직은 경으로서 안을 곧게 함이요, 규는 의로서 밖을 바르게 함이다. 경과 의를 크게 세우면 덕은 결코 외롭지 않다" 고 했다.
이러한 글이 좋아 보이는 것은 사상과 이념이 사라지고 실리만이 난무하고 있는 이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