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핵심을 은유하다
장계향이 남긴 가장 큰 몫은 물론 [음식디미방]이다. [음식디미방]이 없었다면 역사는 그를 잊었을 것이다. 동양 최초의 요리서라는 정의들은 계향에게 걸맞지 않는 호들갑이지만 어쨌든 그 때문에 세상이 계향을 주목했으니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음식디미방]은 일반이 알듯이 조선 중기 양반가의 조리법을 기술한 단순한 레시피북이 아니다.
이번에 나는 새로운 발견을 몇 했다. [음식디미방]은 요리책이 아니라 여성이 도에 이르는 방법을 조목조목 기록해 놓은 경전이라는 것이다. 확대해석이라고? 글쎄, 그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나는 이 책에 깊은 은유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착면법 하나만 들여다보자. “녹두를 맷돌에 쪼개어 물에 담갔다가 충분히 붓거든 껍질을 벗기고 또 맷돌에 갈아 물에 거르되 눈이 가는 채로 받치고 다시 가는 모시 베에 받아 뿌연 빛이 가라앉거든 맑은 물을 따라 버리고 뿌연 물을 그릇에 담아 가라앉거든 또 웃물을 따라내고 가루가 가라앉거든 종이에 얇게 널어 말려서 마른 후에 다시 채로 쳐서 가루로 뒀다가 써라”라는 까다롭고 정교하다 못해 고행에 가까운 지시가 끊임없이 나온다. 당장 입에 넣을 식량이 귀하던 시절 이런 까다로운 조리법이 가당할까. 왜 굳이 이런 성가신 과정을 거치라는 것일까. 수십 번의 손길과 긴 노동시간 끝에 드디어 얻게 되는 그 가루는 그냥 국수를 만드는 녹두 가루에 불과한 것일까. 혹은 인간성의 바닥에 녹말처럼 가라앉아 있는 인이나 의를 공들여 볕에 말리고 채에 쳐서 하얗게 드러내는 과정의 은유가 아닐 건가.
의문은 끝도 없었다. 나는 그 부분에서 이렇게 썼다. 아니 책상 앞에서 은은한 눈으로 그만 자라고만 말하던 장계향이, 책의 맨 끝장에 와서야 내 손에서 붓을 뺏더니 이렇게 썼다. “딸들아 너희는 이 배를 타고 오너라, 경서의 주석보다 확실하고 시법보다 향기로우며 서법보다 달디달지니….” 나는 놀라서 빼앗긴 붓을 노려봤다. “이것은 천지간에 둘도 없는 경서니라, 조상의 혼령을 잠시 이승에 모셔오는 주류와 네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는 어육과 채소류에 네 서방과 빈객들을 아름다이 대접하는 면병과 유밀과를 만드는 법이니라. 그러면서 이 법은 너희를 저 건너편 도의 세상으로 실어갈지니 너희는 부디 이 나룻배가 쉬이 상치 않게 간수하거라.” 열댓살 무렵 ‘학발시’를 쓰던 기개가 고대로 드러나는 어투였다.
육경의 주석이 하늘의 말씀이라면 곡식과 소채와 육고기와 물고기 안에 더 생생한 하늘의 말씀이 들어있다는 것을 계향은 진작 알고 있었다. 음식은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런 집중과 몰두를 반복하는 것이 바로 안방에서 딸들이 배우고 갖춰야 할 경이라는 것이 장계향 칠십 평생의 터득이었다. 사랑에서 남자들이 경전으로 성인 되는 길을 찾을 때 안방의 여인네들은 더욱 구체적인 방법으로 같은 곳을 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계향은 일러 주고 싶었고 그걸 ‘디미방’이란 이름을 빌려 딸들에게 은밀히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계향은 책 뒷장 안쪽, 출판동네 말로 하자면 표3에다 굳이 “ 이 책을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제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가되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말고 부디 상치않게 간수하라”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한때 나는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탐독했다. 니어링의 밥상은 조리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자연그대로의 상태로 식탁 위에 올리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도저한 자연주의에 동의했고 밥상이 곧 철학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각성했었다. 그러나 수백 년 전 장계향의 요리책은 자연에다 인간의 정성을 플러스한 밥상의 힘을 말하고 있다. 수십 번 손이 가고 수십 시간 공력을 들인 음식은 가공하지 않은 천연상태의 열매와 낱곡에 비해 훨씬 큰 에너지와 부가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그 에너지와 가치는 소모되는 것도 아니다. 정성과 공력을 들인 음식은 먹는 사람을 고귀하게 만들고 조리한 사람을 은연중 그윽한 세계로 실어가주는 나룻배가 된다. 그렇다면 20세기 헬렌의 자연주의는 17세기 장계향의 도학 앞에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한 땀씩 누벼가는 누비질이 면벽수행의 다른 이름이라면 녹두에서 녹말을 얻는 지난한 작업 또한 딸자식에게 제 속 깊이 가라앉은 자비와 어질음을 길어 올리는 방편이 될 것이다. 계향은 그런 각성을 남자들의 눈이 닿지 않는 요리책 속에 숨겼다. 나는 진작부터 조선 중후기 안방과 사랑방의 내왕의 정도에 관심이 깊었다. 두 지점의 거리를 관찰하고 유추하면 별의별 상상력이 작동했다. 장계향과 [음식디미방]에 대한 흥미도 실은 거기서부터 출발한 것이지만 마침내 나는 이 책이 겉보기엔 평이한 요리서에 불과하면서 실질은 성리학의 핵심을 은유한 진귀한 철학서임을 발견하게 됐다. 지금 나로선 그 놀라움과 눈부심을 가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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