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계향: 정부인 장씨(1598~1680)로 더 잘 알려진 장계향은 경북 안동 금계리에서 태어나서 경북 영양 석보촌에서 타계했다. 만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이조판서를 지냈으므로, 법전에 따라 정부인의 품계가 내려진다. 시서화의 재능이 뛰어났지만 평범한 어머니의 길을 선택해 일곱 아들을 숭앙받는 선비로 키워낸다. 성리학의 본질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과 함께 울며 구체적 개선책을 모색하고 베푸는 처사적 삶을 통해 시가인 재령이씨와 친가인 안동장씨 두 집안을 모두 당시 사회공동체의 핵심인 큰 가문으로 일으켜 세워놓는다. 시6편, 초서 1점, 맹호도 1점, 서간1편이 전해질 뿐이고 만년에 [음식디미방]이란 요리책을 남겼다.
'학발시(鶴髮詩)'
며칠 후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 계향은 노파의 집을 찾아갔다. 집은 춘파 마을이 웃검제와 이어지는 맨 끝에 외따로 버섯처럼 돋아 있었다. 마당엔 사람이 없고 방 안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싸리울을 두른 방 두 칸 부엌 한 칸의 흔한 세칸 초가였다. 계향은 장옷의 깃을 바싹 움켜쥐고 사립문 안으로 썩 들어섰다. 개도 없는지 조용했다. 처마에는 겨우내 먹을 시래기 묶음들이 주렴처럼 매달려 있었다. 찬 공기에 계향의 입에서 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안에 누구 있소?”
전에 봤던 그 젊은 여인이 방문을 열었다. 노파와 마주 앉아 저녁상 같은 것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는 아랫동리에 사는 장계향이라고 합니다. 실은 며칠 전 이 앞 길을 지나다가 마음에 걸리는 광경을 보았으므로… 사정을 좀 들어 볼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젊은 여자는 말이 없었고 노파가 문 앞으로 기어나왔다. 상 위에 놓인 그릇은 딱 둘 뿐이었다. 시래기 위로 좁쌀이 두어 낱 얹혀 있는 시래기죽이었다. 초겨울에 벌써 시래기죽이라니.
“아이고. 이런 꼴을 보여드려서 남새스러워서 어쩔까. 경당어르신댁 애기씨가 어찌 저희 집에… 어른들이 애기씨를 몸소 보내신 것도 아닐 게고….” 흰 끈으로 머리를 동여맨 노파가 더듬거렸다.
젊은 여자가 곶감 서너 개를 나무접시에 담아 내왔다. 방 안은 어지럽진 않았지만 바닥에 깔아놓은 삿자리가 차가왔다.
“아이고. 아들 셋이 다 호패에 올라가 있어서… 관에서 수 자리에 보낸다고 다 델꼬 갔니더… 날은 이렇게 치운데… 아이고 … 북쪽은 오죽이나 추울까….” 그래서 땔 나무가 있어도 방에 불을 때지 않는다 했다.
젊은 아낙의 눈에도 금방 눈물이 맺혔다.
계향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기껏 “난과 치는 번갈아 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잠시 정세가 어지러우나 곧 잠잠해질 것이고… 자제분들은 돌아올 것입니다”고 말할 뿐이었다.
계향은 눈을 감았다. 어둠이 먹물같이 빽빽하게 방 안에 들어차 있었다. 농민의 삶은 깨지기 쉬웠다. 그저 하루 밥 두 끼를 먹기만해도 족했을 생활인데도 언제나 얇은 접시처럼 위태로웠다. 흉년이 들거나, 역병이 돌거나, 전란이 일어나면 민초들은 수없이 굶주리고 죽어갔다. 그들의 절망은 얼마나 깊고 슬픔은 얼마나 사무친 것인가. 계향은 그 깊고 사무친 마음 안으로 제 마음을 쑥 집어 넣었다.
그날 돌아와 쓴 시가 '학발시(鶴髮詩)'였다.
며느리가 수심에 잠기어 시어머니 뫼시는데, 만리변방에 군역간 아들과 남편은 소식도 없다. 80이 넘은 시어머니 깜빡깜빡하며 언제 목숨이 끊어질지 모르는데, 나는 그것을 듣고 함께 슬퍼하며 다음의 시를 짓는다.
학같이 새하얀 머리되어 병이 지쳐 누웠는데
자식은 멀리 만 리 되는 수자리에 갔구나
만 리 밖 수자리의 내 아들
어느 달에 오려는가?
학같이 새하얀 머리되어 병에 지쳐 누웠는데
서산에 지는 해는 붉게 타며 저물어간다
하늘에 손을 모아 빌고 또 빌어봐도
무심한 하늘은 막막하여 대답조차 없구나
학같이 새하얀 머리는 병을 무릅쓰고 달려 나갔다
혹은 일어서고 혹은 넘어졌다
지금 오히려 이와 같은데
속옷 자락은 어찌 이 모양인가
계향은 나중에야 아버지 흥효가 그 집에 정기적으로 미곡과 약재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아마 계향의 [학발첩]을 읽고 난 다음부터였을 것이다.
계향은 불원간 홀로 남은 포수 김가의 어머니를 찾아가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장정들은 여전히 북쪽으로 걸어 올라갔고 일부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수많은 어미들이 눈물로 짓무른 눈을 마침내 제대로 감지도 못하고 죽어갔다. 아아, 이 백성은 언제쯤 사람답게 살아볼 날이 올까. 계향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탄식했다.
그해 폭설이 쏟아지던 날, 계향은 장작 한 짐과 미곡 다섯 말을 바우에게 지워 포수의 어미를 찾아갔다. ‘학발시’를 쓸 때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머리 허연 안노인이 구르듯 달려 나와 계향을 맞았다. 어릴 적에도 중년이 된 지금도 백성의 삶은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구나. 답답하고 우울해서 계향은 한참을 지겟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수제비처럼 넙적한 눈송이가 너풀너풀 내려와 검은 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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