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문집과 필사의 전통을 이어가다

이춘아 2022. 2. 12. 01:58

허경진,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 도서출판 푸른역사, 2003.

문집과 필사의 전통을 이어가다

대전 송촌동에 있는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옛집(2016년 국가지정문화재 ‘소대헌 호연재 고택’으로 지정되었다)은 고전문학의 보물 창고이다. 처음에는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에게 호연재 김씨의 한시를 학위논문 주제로 정해주었는데, 이 학생을 종손에게 보내어 자료를 찾다 보니 끝없이 나왔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호연재 김씨(1681~1722)의 한시 연구를 위한 자료 수집이 아니라, 조선 후기 사대부 문인 또는 지식인들의 생활사를연구하기 위해서 자료를 수집하게 되었고, 호연재의 옛집과 그들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는 선비박물관을 드나들게 되었다. 

이 부부뿐만 아니라 후손들도 계속 문집을 남겼으며, 고소설도 여러 종류 필사하여 읽었다. 여성들은 종갓집의 며느리답게 음식 솜씨를 전수하며 요리책을 만들기도 했다. 쌍륙이나 상영도 같은 놀이 도구부터 서랍이 쉰 개나 달린 약장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었다. 한쪽에는 200권이 넘는 책력이 쌓여 있었는데, 이들은 책력에다 그날그날 중요한 사항을 기록했다. 200년치의 생활 일기가 오롯하게 전해져 오는 것을 보고, 잠시 숨이 멎기도 했다. 

고전문학을 교과서에서만 읽어보았던 학생들에게, 그래서 옛날 작가가 살던 집이 있고 그 종손이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다면 깜짝 놀라기도 하는 학생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이번 학기에도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과 두 차례나 호연재의 옛집을 찾아갔었다. 호연재가 앉아서 시를 지었던 안방에 앉아 차를 마시기도 했고, 호연재가 거닐었던 뒷동산 가묘 앞에서 감을 따 먹기도 했다. 소대헌 호연재 부부가 처음 이 집으로 이사와서 심었다는 연못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호연재의 시를 읽어보기도 했다. 교과서로만 고전문학 작품을 배웠던 학생들에게 시인의 자취를 느끼게 하고 우리 조상들이 생활하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몇 년 동안 애쓴 보람이 있을 것이다. 

호연재 집안에서는 호연재가 쓴 [자경편(自警編)]이 대표적인 계녀서로 꼽힌다. [자경편]은 글자 그대로 자신을 경계하여 쓴 글이지만, 딸에게 주는 글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한글로 번역되어 읽혀지다가 외손자에 의해 다시 한문으로 번역되어 본가로 되돌아왔다. 

[자경편]은 ‘스스로 경계하는 글’이므로 부모가 딸을 가르치는 계녀서와는 성격이 다르다. 또 호연재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상황을 담은 글이므로, 호연재 자신과 소대헌의 부부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이 글이 다른 계녀서와 다른 점은 특히 ‘계투장(戒妬章)’에서 나타난다. 호연재는 이 장에서 투기란 부끄러운 행실이지만 남성의 패덕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지아비가 근실하게 온갖 행실을 닦고 지어미가 경건하게 덕을 닦는다면, 어찌 지아비가 창기와 즐기는 패덕이 있을 것이며 어찌 지어미가 투기하는 악행이 있겠는가?”

호연재는 겉으로는 ‘(여성의) 투기를 경계하면서, 실제로는 부부 관계를 무너드리는 남성의 패덕을 경계하였다. 호연재의 ‘담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부의 은혜가 비록 중하지만 제가 이미 나를 깊이 저버렸으니, 나 또한 어찌 홀로 구구한 사정을 보전하여 옆 사람들의 비웃음과 남편의 경멸을 스스로 취하겠는가?”

남편이 나를 저버리면, 나도 구태여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는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이 직접 첩을 골라서 남편에게 추천하는 시대였다. [사씨남정기]의 사씨 부인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씨 부인은 아마도 처음에는 첩 교씨를 동맹국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호연재는 첩을 적국이라고 표현했다. 

적국이란 것은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가까이 하면 당연히 그 단점을 알게 되고, 단점을 알면 차츰 위엄이 없어진다. 위엄이 없어지면 공손치 못한 일이 자주 생기게 되고, 공손치 못하면 분노가 생긴다. 분노가 있으면 원망이 깊어지고 위태로운 기미가 차츰 일어난다. 이러므로 처음부터 스스로 멀리하여 피차에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 비록 제가 장부(남편)을 유혹한들 어찌 감히 규방을 엿보랴. 

호연재가 남편에게 매달리지 않고 동등한 관계를 유지한 바탕에는 ‘명문의 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호연재는 ‘자수장’에서 “내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부모께서 낳고 길러주신 은혜를 입었으며 명문에서 생장하였으니, 어찌 녹록하게 금수의 무리와 더불어 길고 짧음을 다툴 수 있겠는가?" 하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여기서 ‘금수’란 자신과 갈등 관계에 있는 주위 사람들을 가리킨다. 

당시의 혼인은 가문 대 가문의 만남이었다. 따라서 호연재는 친정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부부 관계도 대등하게 생각했으며, 첩이 있더라도 과민 반응하지 않았다. 호연재가 수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큰 살림을 의연하게 꾸려나간 바탕에는 이러한 자부심과 독립 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을 글로 정리하여 자기 자신을 경계하고 딸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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