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며 산 생애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남다르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잡지에 실린 삽화도 부러워하며 흉내내어 그려보았을 정도로 말이다. 초등학교에 근무했던 3년은 미술을 특기로 삼은 계기가 되었다. 언젠가 인천 시내의 장학사 교장이 시찰 온다면서 온통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내가 맡았던 반은 미술 수업을 하게 되어 있었다. 주제가 ‘내 친구’였는데 손님들이 수업안을 바닥에 깔고 앉아 아이들과 같이 웃고 재미있어 하던 기억이 난다.
수업 끝에는 작품을 다함께 비평하기로 했는데 아이들은 느낀 대로 크게 손뼉을 치면서 “와아! 잘 그렸다!”라든가 “에이~ 너무 작게 그렸네요” 혹은 “너무 기운 없게 그렸어요”하는 식으로 떠들썩하게 평을 했다.
뒤이어 내가 “다음번에는 잘 그렸다고 칭찬받도록 그려보고 싶은 사람!”하고 물으니 누구랄 것 없이 모두 손을 들어서 다같이 손뼉을 치며 수업을 마쳤다. 그 수업이 끝나고 강의를 평가하는 자리에서 근래에 맛보지 못한 즐거운 수업을 보게 되어 기뻤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후, ‘미술 특기교사’라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림’은 정말로 나의 운명이었던 같다. 평양으로 시집 간 후, 집안에 달력을 그려서 걸었더니 남편이 병원에 꼭 필요하다고 해서 매달 석 장씩 그렸으니 늘 그림과 함께 살아온 셈이다.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연필, 크레용, 수채화물감, 크레파스만 보면 반가워서 보관했고, 종이도 아무것이나 고맙게 썼었다. 특히, 인쇄소에서 버린 번들거리지 않는 종이를 얼마나 반겼는지 모른다. 언젠가는 유화도구를 선물 받기도 했지만, 나는 수채화가 좋아서 수채화만 그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수채화만을 고집하고 있다.
6.25동란 때, 평양에서 피난 온 시집식구들과 친정에서 함께 살았던 시절, 큰딸이 여덟 살이었다. 세 동서가 낳은 아이들이 아홉 명, 모두 합해 열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즐겁게 노는 방법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림 그리는 일을 택하게 되었다.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나가는 일은 즐거웠다. 아이를 등에 업기도 하고, 손을 잡고 걷기도 하며 인천 자유공원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노래도 부르고 그림도 그렸는데 유심히 우리를 보고 있는 분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 어느 고아원에서 나오셨습니까?” 하긴 열 명의 아이를 끌고 그림을 그리게 하는 사람은 단체를 빼면 없을테니.
이렇게 자란 우리 아이들은 여기저기에서 그림을 잘 그렸다고 곧잘 상을 타왔다. 그 때문인지 큰딸 명애는 미대를 거쳐 중견화가가 되었다. 나는 딸과는 관계없이 그림 그리는 일이 즐거워 내 주위의 아이들과 토요일마다 그림 모임을 이끌어왔는데 조금씩 사례비를 받아 맹인들을 위한 점자도서관을 후원하였다.
언젠가 화가가 된 맏딸이 집에 다니러 왔다가 “어머니, 이 자화상 정말 잘 그리셨네요. 이 그림, 제가 빌려가도 될까요?”라고 말하였다.
“고맙기도 하지. 난 딸의 칭찬을 들을 때가 제일 좋더라.”
그렇게 사인도 하지 않은 채 딸이 가져간 자화상이 수채화협회 공모전에서 입선이 되었다. 그후, 6년동안 공모전에 출품, 입선과 특선을 계속해서 수채화협회 회원이 되었다. 내가 조금씩 후원을 해오던 한국점자도서관의 육병일 관장이 1992년 ‘위대한 서울시민상’을 받았는데 부상으로 천호동에 170평의 점자도서관 건축부지를 받았다면 건축기금을 도와달라며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이구, 육관장! 눈으로 보지 못해 우리 형편을 모르시는군요. 못 도와드려서 미안해요.”
내가 미안스럽게도 거절을 했더니 그림을 기중해주면, 들고 다니면서 팔아 건축기금을 마련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까지 내 그림이 돈이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었었다. 점자도서관 건립을 위해 그림 100점을 기증, 그해 10월24일부터 한 주간 사간동에 있는 출판문화회관에서 ‘점자도서관 건립기금 조성 박정희 수채화전’을 열였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적지 않은 기금이 마련되었고 점자도서관 건립의 기초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인천 시각장애인복지관 건립을 위한 자서전을 열자는 요청도 와서 그림을 끊이지 않고 준비하게 되었다.
팔순에는 건강하게 그림 그리며 살아온 인생이 너무 감사해서 자식들의 도움으로 그림 잔치를 열고, 그림을 판 수익을 앞을 못보는 분들에게 나누어 드리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언젠가 남편이 은퇴하면 집을 팔아서 생활비로 쓰자고 약속했었는데 그림지도를 하면서 수입을 얻고 살게 되었으니 기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샘솟아 즐거운 마음으로 그린다. 그러다보니, 그리는 솜씨도 점점 나아지는 것 같다. 물론 만족은 못하지만 나날이 자라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기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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