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인생이 내게 묻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당돌하지만 이 물음은 국적과 민족, 고향과 국가를 둘러싼 분열과 갈등에 고민해 온 우리 주위에 늘 떠도는 물음이었습니다. 사춘기 때 나는 이 물음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안락하고 즐거운 일이 없을까 궁리하며 눈을 굴리면서 바깥 세계만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든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막아보았지만 마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그 물음은 내 주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어? 시간만 소모할 뿐이야. 도대체 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이런 반문이 내 머리를 꽉 채웠고 나는 그 목소리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지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켜졌고, 도저히 그 목소리로부터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스무 살 때의 일입니다. 부모의 나라인 한국을 처음 찾아가 여러 가지를 보고 들으면서 깊이 생각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내가 인생에 대해 묻는다기보다는 인생이 내게 묻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좀 과장해서 말하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자아의 질곡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나의 출신이라는 ‘운명’으로 눈을 돌렸고, 그것을 통해 나라는 존재에 드리워진 실존적 물음에 이끌리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자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아’와 자주 혼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기중심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타인의 기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을 밀어붙이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인데,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기만 생각하는’ 모습에 피곤함을 느낍니다.
앞에서 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하기 이전의 나는 ‘자기중심주의’에 푹 빠져 있었던 사람입니다. 얼핏 보면 순진무구한 청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쌓아 올린 작은 성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밖을 향해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서 바깥 세계를 바라보며 모든 인간을 의심하고 오로지 자기 일에만 열을 올리던 거의 ‘나르시스트’와 비슷한 자기중심주의자였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해가 뜨든 날이 저물든 머릿속에 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치 않은 이유를 내세워 ‘자아’를 발견했다고 말은 했지만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아’와 ‘자기중심주의’는 다릅니다. 자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식적으로 자기에게 묻는 ‘자아의식’이라도 해도 좋을 듯 합니다.
‘자기중심주의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자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적고 ‘자기중심주의자’라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자기중심주의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사람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지만 ‘자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대개 ‘타자’의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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