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땅이 원하는 건축

이춘아 2022. 5. 14. 00:38

정기용, [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현실문화연구, 2008.

향토박물관: 신성한 땅, 땅이 원하는 건축

향토박물관 터를 찾아갔을 때, 그 터가 서창마을의 적상산 기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다. 즉각적으로 필자는 “이곳에는 건물을 지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했었다. 그곳이 너무나 신성한 땅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주 적상산은 예사로운 산이 아니다. 적상산은 보통의 산처럼 뾰족한 삼각형이 아니라 평평한 바위산으로 광활한 영역에 걸쳐 있다. 무엇보다 이 산은 [조선왕조실록]의 사고지(史庫址)였을 만큼 깊고 높고 험하다.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전쟁 무렵 북한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에도 [조선왕조실록]이 소실되지 않았을 만큼 깊고 특별한 산인 적상산은 가을에 단풍이 들면 여인이 붉은색 치마를 두른 것 같다 하여 ‘적상’이라 하는데, 지금도 그 정상에 올라가 보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서창 땅은 여가적 의미로도 그렇고, 산의 특별한 생김새에서도 그렇고, 마을이 시작하는 완만한 경사면을 봐서도 그렇고, 군식으로 자라나는 느티나무들까지도 그렇고, 그 모든 것이 두루두루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도 이 평범하지 않은 땅에 박물관을 지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어쨌든 건축이 너무 두드러지지 않으면서 땅을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어설프게 조화롭기 보다는 공간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건축으로 배치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무주의 서창 향토박물관은 무주의 땅과 사람들을 기억하고 나누기 위한 공간이다. 향토박물관을 설계하면서 깊이 생각해야 했던 점이 사실은 건축의 언어보다는 외부공간에서는 무엇을 공유하고 내부공간에는 어떠한 콘텐츠로 채울 것이냐에 대한 것이었다. 말이 향토박물관이지 우리는 향토지리지 같은 성격의 것을 만들려고 했다. 그동안 손쉽게 만들었던 향토박물관의 천편일률적인 성격, 즉 낫과 호미와 지게, 다듬잇돌, 연자방아, 맷돌 등을 전시실에 던져놓고 ‘이것이 우리 조상이 썼던 물건들이다’라고 하며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향토’라는 이름의 박물관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무주의 서창 향토박물관은 김봉렬 선생(한국고건축학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와 함께 전시의 개념과 내용을 상세하게 기획했었다. 하나는 무주의 자연조건과 풍경이고, 다음은 무주 땅의 역사이고, 마지막으로는 무주의 산물과 무주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무주 주민이 무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향토박물관에 와서 인식할 수 있도록 전시실 내 가장 긴 북쪽 벽면에 2만여 무주군민의 사진을 진열할 계획도 세워놓았던 것이다. 개별 사진보다는 마을 단위로 주민들의 단체사진을 찍어서 전시하고, 여유공간에는 앞으로 무주 주민이 될 사람들의 얼굴을 1년 단위로 교체 보완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기획안의 섬세함에도 불구하고, 시공이 전시전문업체로 넘어가면서 향토박물관의 내용은 대단히 미약한 수준으로 퇴색되었다. 현재 향토박물관의 내부 콘텐츠를 보완하는 것이 건물 관리보다 더 시급한 문제다. 향토박물관이 다른 성격의 박물관으로, 이를테면 ‘조선왕조실록 박물관’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하고 또 그것이 왜 만들어졌는지 연구하며 역사의 진실성과 투명성을 후손에게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향토박물관 건축은 건물 전체의 외형은 차분하게 하되 공간을 세우고 에워싸는 방법으로 경사진 땅의 흐름을 최대한 존중하고자 했다. 산기슭에 자리할 조그만 박물관의 기능과 역할은 그렇게 욕심을 낼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화장실은 박물관 방문객이 많지 않다는 것과 또한 박물관을 찾는 사람만이 아니라 적상산 산행길을 위해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음을 고려해 박물관의 영역에서 길과 가까운 곳으로 떼어냈다. 또한 박물관 내부의 전시기능에 따라 영역을 확실히 정하고 건물을 몇 개의 채로 구분하면서 부피를 최소화했다. 향토박물관을 들어서면, 필로티 위로 올라선 건물들은 가볍게 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땅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필로티로 땅을 딛고 서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 것인데, 사이사이로는 산과 특별한 땅의 풍경이 들어온다. 

현재 향토박물관에는 무주에 있는 6개 면과 읍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어 자연과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소박하게 보여준다. 향토박물관을 방문하고 되돌아 나오는 사람들의 눈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느티나무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 마을을 오래 떠받치고 서 있는 당산나무다. 박물관의 터를 신성하게 보이게 하는 인자들 - 나무, 돌담, 계곡, 적상산 정상의 병풍바위 등- 이 박물관을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박물관이 그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적상산 기슭의 전체 풍경과 총체적 관계를 맺는 건물로 인식되게 했다.이 점이 향토박물관 건축의 가장 중요한 기획의도라 할 수 있다. 향토박물관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적상산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계하다가 여러 문제에 봉착했을 때마다 필자는 적상산에게 물어보곤 했다. 

향토박물관 작업을 하면서 고민했던 모든 문제들은 여러 장의 스케치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결국 여러 가지 결정에 따라 실현된 박물관과 아직도 종이 위에 남아 있는 박물관, 그리고 앞으로 수정 보완했으면 하는 미래의 박물관, 이 세 가지 박물관 때문에 무주 서창 향토박물관은 필자에게는 아직 미완성의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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