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영 책수선 지음,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위즈덤하우스, 2021.
(5~7쪽)
책 수선가는 망가진 책을 수선한다.
나는 망가진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한다.
책 수선가는 기술자다. 그러면서 동시에 관찰자이자 수집가다. 나는 책이 가진 시간의 흔적을, 추억의 농도를, 파손의 형태를 꼼꼼히 관찰하고 그 모습들을 모은다. 책을 수선한다는 건 그 책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런 모습들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이 일을 한 지 올해로 8년째다. 곤충과 식물 채집하기를 좋아했던 1996년도의 나는 어른이 되어서 망가진 책 수집하기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유리를 불고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을 다루던 2004년부터 2012년의 나는 그 이후로 이렇게 책을 수선하며 살아가게 될 줄 전혀 몰랐다. 책 수선을 처음 배웠던 2014년의 나는 앞으로 망가진 책을 고치게 될 줄만 알았지, 이렇게 새 책을 출간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책에는 '리디셀렉트'에 2020년 9월에서 2021년 5월 사이에 연재했던 글 스물한 편과 새로 쓴 아홉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간 개인 의뢰로 받은 파손된 책들을 보고 만지고 수선하며 쓴 독후감이라 생각해도 좋겠다.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수선을 해서 간직하고 싶은 책이 한 권씩 더올랐으면 좋겠다. 어린이들이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책 수선가를 꿈꾸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런 일들이 보다 흔한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13~15쪽)
‘살아남는 책’
부모님의 누런 책들과 나의 하얀 책들 중 과연 100년 후에도 살아남아 있을 책은 어느 쪽일지를 생각해보면 난 사실 이미 오래될 대로 오래된 책들로 마음이 더 기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누런 책들은 부모님이 굳이 버리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영원히 그 자리에서 사람 손을 타지 않고 가만히 자리를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언젠가 내가 그 책들을 물려받게 되더라도 그게 부모님의 유품이라는 감정적인 이유에서든, 오래된 책을 수집하는 나의 취향 때문이든, 이제는 절판되어 구할 수 없다는 희소성 때문이든, 한동안은 똑같은 새 책이나 중고책으로도 쉽게 다시 구할 수 있을 새하얀 책들보다는 당연히 호기심이 더 많이 갈 것이다.
만약 세상에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책이 있다면, 폐지가 되지 않고 오래 살아남고 싶은 책이 있다면 알려주고 싶은 팁이 세 가지 있다. 우선 첫 번째는 누가 봐도 귀하거나 중요한 책이 되는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구텐베르크 42행 성경]과 같은 책으로 태어나면 온 세계가가 나서서 지켜줄 것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일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는 책을 무척 아끼는 사람의 집으로 가는 거다. 책을 좋하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물리적으로도 책을 아끼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망가지더라도 버려지지 않고 나 같은 책 수선가에게 데려가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 세 번째 팁은 역설적이게도 인기가 없는 책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는 방법이다. 이건 약간의 운도 필요하다. 인기가 없어도 너무 없는 책은 폐기처분될 위험도 많기때문에 그 정도는 곤란하고, 계속 서점에 진열된 명분은 있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은 남기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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