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성묘(1)

이춘아 2022. 9. 10. 00:39

전성태, [두 번의 자화상], 창비, 2015

(181~187쪽)
“컵라면 하나 먹겠나?”
병사는 당황해서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저었다.
“김 중사 돌아오려면 한참 남았는걸.”
벽시계 바늘은 오후 네시로 오르고 있었다.
“먹고 싶은 걸로 하나 골라보게나.”
이등병은 길거리를 내다보고 다시 몸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얼굴에는 어떤 기대감과 곤혹감이 가득했다.
“김 중사가 초코파이 하나도 입에 대지 말라고 엄포를 놓던가?”
병사는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당황해서 얼른 입을 떼지 못했다.
“아닙니다”
노인은 싱끗 웃었다.
“그 사람이 늘 하는 장난이지. 자네한테 잠시나마 휴식을 주느라 심부름을 시켜놓고 간 거야. 생각해보게. 물품 구매야 쪽지를 던져 놓고 가면 내 알아서 다 챙겨놓을 텐데 괜히 자네를 떨궈놓고 갔겠나. 그렇지 않아?”
병사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게 지칫거리며 섰다가 병사는 컵라면 진열대로 걸어갔다. 진열대 앞에서 마치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사람처럼 한참 망설이다가 그는 라면 하나를 골라왔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걸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그냥 먹게. 이제 자주 볼 테니 내가 고객한테 사은품을 주는 셈이지.”
병사는 시식대로 물러났다. 그는 라면이 붇기를 기다리며 가을 햇살 부신 창으로 몸을 맡기고 앉아 있었다. 기운 햇살이 강물에 반사되어 병사는 뒷모습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노인은 병사에게 김치 한보시기를 내놓았다. 병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앉았다. 마당과 도로에 걸쳐 깔아 둔 비닐 멍석에서 고추가 말라가고 있었다. 첫물로 거둔 고추는 이미 투명한 암적색을 띠었고, 두물째 거둔 고추는 한숨 죽어 꾸덕꾸덕했다. 올 고추농사도 잘되었다. 노인은 두 무더기로 갈라서 말린 고추를 골고루 뒤적여주었다. 더러 노인네 고추를 보고 빨갱이들 곁에서 자라서 때깔이 난다고 농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병사가 가게 밖으로 나와 공중전화기를 들었다. 통화 연결이 안 되는지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병사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내 잘 지낸다. 걱정 말라는 소리만 반복하다가 끊었다. 부모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병사는 정작 목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과는 아직 통화를 못한 눈치였다. 전화번호를 눌렀다가 수화기를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병사는 가게를 들락거리며 서너 차례나 더 전화를 걸었다가 번번이 힘없이 돌아섰다. 마지막엔 수화기를 금방 내려놓았다. 노상 보는 풍경이지만 노인은 김 중사가 부탁한 일도 있고 해서 멍석에 엎디어 곁눈을 거두지 않았다. 병사가 물러난 마당으로 승합차 한대가 올라와 멈추었다. 조수석에서 캐주얼 차림을 한 젊은 사내가 내려서 노인에게 다가왔다.
“말씀 좀 여쭐게요.”
노인은 고추 멍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가슴패기에 여행사 명찰을 달고 있었다.
“이 근방에 중국군 묘지가 있다던데요?”
노인은 승합차를 바라보았다. 노인과 조무래기들까지 포함하여 일가로 보이는 사람들 대여섯 명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국인 성묘객들인 모양이었다.
“적군묘지를 찾는구먼?”
“아…. 네, 그렇지요. 중국군 묘지요.”
노인은 손가락을 세워 옥수수밭과 소나무 숲이 만나는 길가 언덕을 가리켰다. 그들이 이미 지나온 길이었다.
“길에서는 잘 안 보여. 숲 끼고 있는 작은 둔덕 있지? 아니, 그 건너편 말일세. 그렇지. 저길 넘으라고. 중공군들은 오른편에 있어.”
노인에게 중국은 언제까지나 중공이었다.

“눈앞에다가 두고 빙빙 돌았네요. 내비 찍고 왔는데도 도통 찾을 수가 있어야죠.”
“많이들 그래.”
“그렇게 깊이 들었으면 뭔 표지판이라도 세워놓지. 원….”
사내는 몸을 돌려 승합차를 향해 중국말로 소리쳤다. 뒷좌석 차창으로 얼굴을 뺀 중국 노인이 두 손을 맞잡아 들어 보이며 반가워했다. 사내가 몸을 돌려서 노인에게 말했다.
“육이오 때 조선으로 간 형님이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다 이름 없이 묻혀 있는데 가본들 어디서 찾누? 괜히 맘만 더 상할걸.”
“글쎄요. 일정에도 없는 곳을 데려다 달라해서 당황했지 뭐예요. 그나저나 동네 경치가 참 좋네요.”
가이드 사내가 강과 산을 둘러보았다. 노인이 말했다.
“혹시 제수용품 필요한 거 없나 물어봐.”
“향 있습니까?”
“지전도 있고 월병에 백주까지 있다네.”
“이것저것 준비해 왔더라고요. 기다려보세요.”
그래 놓고 사내는 승합차에 대고 뭐라고 소리쳤다. 이번에는 아들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차창으로 고개를 빼서 대답했다. 두 사내 사이에 중국말이 오고 간 끝에 가이드 사내가 돌아섰다.
“백주도 필요하다는데요. 애들 과자도 좀 사고요.”
노인이 가게로 앞장섰다.
유리문에 붙은 중국어 광고지를 눈여겨본 가이드 사내가 물었다.
“많이들 오나 보죠?”
“조선족들이 좀 되고 한족들은 많지 않아. 어제 묘지를 둘러보니 추석 앞이라 제법 많이 다녀갔더라고.”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성묘객을 모셔보는 건 첨인데요.”
“한 번은 오지 두 번은 안 오더라고. 하긴 그런 묘지라도 보고 가면 원이 좀 풀릴는지 모르지. 중공이 살 만해진 건 사실이야. 세상도 참 많이 변혔고. 누가 중공군 성묘객을 맞을 줄 알았겠나.” 노인은 비닐봉지를 사내에게 안겼다.
“담에 또 오자는 중국인들 있으면 이리 데려와. 괜히 서울에서 중국 제수용품 구하느라 애쓰지 말고 연희동까지 가서 웬만한 건 다 갔다 놨으니까.”
노인은 가게 앞까지 사내를 따라나섰다.
“지전은 태우지 말라고 이르게. 불날까 봐 군부대랑 군청에서 전전긍긍이야.”
승합차가 멀어졌다. 노인은 승합차가 묘지 쪽에 닿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 가게로 돌아섰다.
신병 아이는 시식대에서 턱을 괴고 앉아 졸고 있었다. 김 중사는 돌아올 시간을 넘겨 늦어지고 있었다. 노인은 뒷방을 기웃이 들여다보았다. 텔레비전이 저 혼자 놀고 있나 싶어서였다. 침침한 아랫목 이불더미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 리모컨은 아내의 손끝에서 떨어져 방바닥에 굴러 있었다. 노인은 무릎걸음으로 문지방을 넘어가 리모컨을 당겨오다가 아내를 들여다보고는 그만 납작해졌다. 아내는 머리에 무슨 누런 천을 둘러써서 얼굴까지 싸매고 있었다. 마치 염을 끝낸 시신 같았다.
“뭐하는 짓거리야!”
심 씨가 화들짝 놀라서 머리에 둘러쓴 걸 벗겨내는데 남정네들 입는 사각팬티였다. 심 씨는 퉁퉁한 눈을 못 뜨고 잠꼬대처럼 물었다.
“왜요?”
“노망 났어?”
심 씨가 손에 쥔 팬티를 심상하게 보고는 옆으로 밀쳐놓았다. 두실한 허리에 느슨하게 두른 복대가 가슴까지 치올라서 눈꼴사나웠다. 그녀는 몸을 옆으로 굴려서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뻗어왔다. 박 노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심 씨는 간신히 앉으며 복대를 당겨 맸다. 그녀는 째리는 눈길로 역정을 냈다.
“내 허리가 똑 부러져야 시원하겠소?”
“남우세스럽게 그걸 왜 둘러쓰고 자빠졌냐고?”
심 씨는 시끄럽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머리가 지끈지끈 패서 좀 둘렀소.”
“젠장, 머리 아프면 약을 먹든가. 빤스 둘러써서 두통 잡았다는 소리는 내 살다 처음 듣네.”
“이녁이야말로 첩 질도 아니고 웬 신발을 끌고 방에 들었소? 드러워라.”
그제야 노인은 몸을 뒤로 밀어서 신발을 털어 벗었다.
“더럽긴? 그것 둘러쓴 것보다 더할까. 상사 걸린 황진이 총각귀신이 씌었나, 그걸 왜 둘러쓰고 자빠졌냐고 그래? 망령 들었어?”

“낸장, 효과도 없구먼. 삼만원짜리 걸레 감을 사 왔네그려.”
심 씨는 팬티를 노인에게 툭 던져 안기고는 편두통 앓는 여자처럼 옆머리에 손을 올려 지끈 눌렀다. 노인은 날아온 걸 털어서 펴 보았다. 강보만 하게 컸지만 틀림없었다. 뒤집어 봐도 팬티였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적의로 팬티를 움켜쥐었다.
“암만해도 병원에 가봐야겠네.”
“참, 이 양반이…. 이걸 누가 시켰는데? 원, 방귀 뀌고 성을 내네.”
“그럼 그걸 내가 시켰다는 소리야, 지금?” “얼러리…”
심 씨가 허리를 짚고 당겨 앉았다.
“작년 겨울에 읍내에 효도 공연단 들어왔소, 안 왔소? 은나노 그런 것 입힌 사루마다라고 당신 손으로 사 온 거 기억 안 나요? 치수를 백오 호로 사 와서 지청구를 했더니 당신 입으로 뭐라 했간? 유망한 중소기업 특허품이다. 전자파도 차단해준다. 은나노인가 뭣인가 나와서 머리에 둘러쓰고 자도 좋다. 자기 입으로 선전해놓고는 이제 와선 누굴 실성한 사람 취급하네.”
듣고 보니 어렴풋한 소리였다. 공연 구경만 하고 앉았기에 염치없고 남자들한테 좋다는 말에 솔깃해서 사 온 것이지만 막상 남의 눈 피해서 열어보니 치수가 너무 컸다. 무안한 김에 사회자란 놈이 읊은 말을 변명으로 둘러댔더랬다.
“넨장, 말이 그렇지… 그걸 둘러쓰라고 만들었을까?”
내외는 서로 반쯤 틀어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말문을 튼 이상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계속)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1) 2022.09.17
성묘(2)  (2) 2022.09.11
‘버터와 밀가루의 흔적'  (0) 2022.09.04
내 직업은 책 수선가다  (0) 2022.09.03
진주같은 동네책방  (0) 2022.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