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테쥔, [백년의 급진](김진공 옮김), 돌베개, 2013.
원테쥔: 1951년 베이징 출생, 중국인민대학 교수. 1983년 중국인민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한 이후, 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 연구실,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 농업부 농촌경제연구센터, 중국경제체제개혁연구회 등에서 근무했으며, 1990년에 중국농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졸업 후 10년 이상을 군대와 농촌 등 기층 현장에서 일했고, 현장의정책 연구에 20년 이상 종사했다.
(222~230)
장장 5000년의 중국 농업문명사를 종합해보면, 소농 촌락공동체 경제의 전통이 ‘인구에 비해 토지가 심각하게 부족한’ 중국의 근본적인 모순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농업국가 중국’이 처한 이 모순적 상황의 제약으로 인해, 역사상 큰 사변들은 종종 천재가 아니라 인재로 발생했다. 호족들이 토지를 독점함으로써 ‘적어서 문제가 아니라 고르지 못해서 문제’인 현실이 초래되었고, 정부가 큰 토목공사를 벌이거나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부역과 세금이 과중하게 되어 유랑민이 넘쳐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때 천재가 발생하거나 외환이 생겨나면, 예외 없이 개혁이 일어나거나 또는 왕조가 바뀌었다. 그런 후 첫 번째로 내세우는 국가시책은 대부분 ‘균전면부’였다.
이른바 ‘한나라와 당나라의 태평성대’는 당시 ‘영토를 개척’하여 농업생산력의 외연을 확대한 일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기타 왕조 가운데 진나라와 수나라는 전란을 많이 겪었으니 예외로 하더라도, 송나라와 명나라 때 시국이 어지러웠던 것은 영토가 협소하여 농업자원과 인구의 비례가 균형을 잃은 것이 주된 이유였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몽고족의 중원 침략이다. 이민족이 침입을 했고, 게다가 귀족들이 초야권을 누리거나 백성들에게 ‘10호 연좌제’를 시행하는 등 폭정을 자행했지만, 원 제국이 87년이나 통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시람과 토지 사이의 모순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경우도 원나라와 비슷했다. 만주족이 관문을 넘어 들어온 후 소수민족으로서 200년이나 통치를 유지한 데는, ‘말이 달린 만큼 토지를 차지하는’ 전통을 빨리 버리고 중원의 도통을 전면적으로 계승한 것이 크게 작용했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청나라 초기 광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 늘어난 성인 인구에게 부역을 부가하기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전국적인 범위로 사람과 토지의 관계가 대폭 조정되어, ‘강희제에서 건륭제에 이르는 태평성대’가 펼쳐졌다.
만청 이후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물어주었으며, 이어서 군벌들의 혼전을 겪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인구가 증가하자, 중국의 1인당 평균 토지점유율은 급속히 하락했고,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 청나라 초기에 영토를 확대하여 농업자원을 늘려놓은 것은 이미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씨족공동체 내부의 ‘양전제’와 ‘소유권과 경작권의 분리’ 및 ‘재산 분할’ 같은 안정적이면서 소농의 끊임없는 번식을 가능하게 하는 내부화된 제도 덕분에 농촌사회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태평천국 농민봉기,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일본의 침략, 두 차례의 내전은 수천만 명의 인구감소(총 인구의 20~30%)를 초래했고, 이런 조정의 변수들은 사람과 토지의 관계에 크든 작든 간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전국적인 범위에서 무조건적으로 진행된 사람과 토지 관계의 재조정은 확연한 지역 간의 격차를 드러냈다. 남방은 소작농이 많고 북방은 자영농이 많았지만, 농민의 생활수준은 남방이 오히려 북방보다 나았던 것은 그런 지역 간 격차의 직접적 표현이었다. 이는 이후 농민혁명이 왜 주로 북방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이후 토지혁명전쟁에서 승리하자 마오쩌둥은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덩샤오핑도 15년 동안 불변이라는 ‘전면적 생산청부제’를 통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했다. 중국의 3세대 지도부는 ‘전례를 그대로 이어받아’ 농민들에게 ‘토지의 가정생산청부권’을 30년 동안 바꾸지 않겠다는 정치적 약속을 했다. 이 세 경우는 모두 토지의 균등 분배를 공통적 특징으로 분배한 것이었다. 모두가 인구에 비해 토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에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의 결과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늘 생각하면서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던 문제, 즉 중국의 농촌이 양극화로 인한 제도적 비용을 감당할 없다는 사실도, 국가가 처한 이 근본적인 모순적 상황의 제약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어떤 경제사학자는 중국이 1000년 전에 농지에서 산출한 작물을 상품화한 비율이 15펴센트였다고 말한바 있다. 근래 중국은 기본적으로 공업화를 실현했지만, 식량 총생산량 가운데 상품화되는 것은 30퍼센터 밖에 안된다. 한 해의 식량 수확 가운데 국가는 총생산량의 15퍼센트 내외만을 점유한다. 관련된 농가 통계연구를 보면, 여전히 50퍼센트의 소농은 토지에서 산출한 작물을 전혀 상품화하지 못하고, 30퍼센트의 소농은 30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상품화율을 보이고 있다. 즉 80퍼센트의 소농이 종사하는 농업에서 잉여가 거의 나오지 않는 문제는, 공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근본적으로 개선되기는 커녕,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국가가 처한 모순적 상황의 제약으로 인해, 폭력적 혁명이든 비폭력적 개량이든 모두 농지를 ‘균등’하게 배분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소농 촌락공동체 경제의 내부화된 재산과 수익 분배 제도는 중국사회의 ‘안정적인 구조’를 만드는 근거가 되었고, 따라서 서구의 산업혁명과 그것이 수반한 자본주의적 사회 진보는 중국에서는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다.
청나라 말 이래로 정부가 주도하는 공업화가 네 번 있었다. 앞의 두 번은 각각 양무운동과 1920~1940녀대 민국 정부의 공업화인데, 모두 관료자본이 소농의 잉여를 과도하게 추출하여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거나 혁명이 폭발했다. 뒤의 두 번은 바로 이 글에서 언급하는 ‘두 개의 역사적 단계’이다. 1950~1970년대에 중앙정부가 사회주의 국가와 전민소유제를 명분으로 추구한 공업화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래로 중앙이 고성장을 목표로 추구하는 가운데 지방정부가 주도한 ‘지방공업화’는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종합적인 국력을 제고시켰지만, 동시에 심각한 자원과 환경 문제를 초래했다. 이런 과정에서 제도적 안배는 객관적으로 여전히, 정부가 자원을 통제하고 농업잉여를 추출할 때 농민과의 거래 비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따라 좌우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서구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완성한 자원 분점 형세는 더 이상 조정될 여지가 없어지게 되었고, 주변의 지정학적 환경은 악화되었다. 중국은 ‘세계 여러 민족의 숲 속에서 자립’함으로써 공업화를 해야만 했고, 공업화를 위해서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반드시 완수해야 했지만 , 상품화율이 지나치게 낮은 소농경제라는 조건속에서 원시적 축적을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건국 이후 초반 3년 동안 4억의 농민이 5000만 명의 도시 인구에게 농산품을 공급하는 일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제1차5개년계획’ 시기에 2000만 명의 노동력이 도시로 가서 공업 건설을 지원하게 되면서 갑자기 도시에 ‘식량 다소비 인구’가 40~50퍼센트 늘어나게 되어, 농산품의 공급 부족 현상이 순식간에 발생했다. 게다가 노동력이 과잉인 소농경제에서 농민들이 실행하는 축적방식은 ‘노동으로 자본 투입을 대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도시의 공산품이 농촌시장으로 거의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공업과 농업 사이에 교환을 실현할 방법도 없었다.
따라서 중국은 부득불 전례 없는 고도의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동원한 자기착취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에서는 ‘일괄구매 일괄판매’와 인민공사라는 상호 의존하는 체제를 시행함으로써, 그리고 도시에서는 계획적인 조달 시스템 및 관료 체제를 세움으로써 공업 농업 노동자가 만든 잉여가치 전체를 점유하는 중앙재정을 통해 2차 배분을 시행하여 중공업 위주의 확대재생산에 투입했다.
그런 가운데 정부는 사적자본주의가 국가자본주의를 포함하여 여러 경제 요소가 병존하는 기존의 ‘신민주주의’ 발전전략을, 단일한 공유제를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과도기의 총노선’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중공업을 집중 발전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자본의 집중과 노동의 배제’가 초래되었고, 농촌의 노동력이 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제한하는 ‘도농 대립적 이원구조’라는 기본 체제가 만들어졌다. 비록 수천수만의 농민들이 국가 공업화를 위한 자본 축적의 단계에서 희생되었지만, 중국은 결국 최단시간내에 이 단계를 뛰어넘었고,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공업의 토대를 형성했다. 1950년대 초부터 1970년대 말에 이르는 이 특수한 역사적 단계가 바로 ‘마오쩌둥 시대’이다. 또는 모든 사람들이 헌신해서 천하를 공평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영웅시대’라고 일컫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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