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오래된 밭에서 솟아나는 흙냄새

이춘아 2022. 10. 21. 16:38

김훈, [개], 푸른숲, 2005. 

(32~35쪽)
- 아이고, 우리 강아지 이리 온. 

주인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줄 알고 마루 쪽으로 달려갔어. 

눈을 막 뜨고 나서 네발로 겨우 걸어다닐 무렵이었지. 달려가보니까 주인할머니는 나를 부른 게 아니었고, 돌을 막 지난 손자를 부른 것이었어. 나는 좀 섭섭했지만 내가 개라는 걸 생각하고 꾹 참았어. 첫돌배기 아기가 뒤뚱거리는 걸음마로 걸어와서 할머니에게 안겼지. 주인할머니의 둘째아들의 첫아들이었는데, 어느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었어. 가끔 할아버지 집에 맡겨졌지. 

내가 보리라는 이름을 갖기 전에 주인할머니는 나를 부를 때도 강아지라고 불렀고 손자를 부를 때도 강아지라고 불렀어. 그래서 나는 가끔 헷갈렸지. 할머니 마음에는 둘 다 비슷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야. 그때는 나도 주인집 손자아기처럼 겨우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이었어. 댓돌 위에서 내려올 때도 앞발을 헛디뎌 나동그라졌지. 그러니까 그 꼴이 둘 다 비슷했을 수도 있었을 거야.  나는 마루 아래서 주인 할머니를 쳐다보면서 꼬리를 흔들었어.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꼬리가 저절로 흔들려.  - 이놈아, 널 부른 게 아니야. 

하면서도 할머니는 팔을 뻗어서 나를 품에 안았어. 할머니의 왼쪽 품에 내가 안기고 오른쪽 품에 아기가 안겼어.  아아. 나는 그때 사람의 냄새를 처음으로 맡은 거야. 놀랍고도 기쁜 냄새였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정답고 포근해서 눈물겨운 냄새였어. 아기의 입과 머리통에서는 삭은 젖 냄새가 풍겼는데, 달콤하면서도 시큼했어. 그 냄새는 이 세상에 막 태어난 것들의 냄새였는데, 여리고 부드러웠지. 너무 세게 들이마시면 부서져버릴 것 같은 냄새였지. 

주인할머니의 품에서는 깊고도 구수한 냄새가 났어. 넉넉하고도 넓은 냄새였지. 먼 데서부터 다가와서 내 콧구멍과 몸 속을 가득 채우는 냄새였어. 그 냄새는 사람 몸의 거죽에서 나오는 냄새가 아니라 할머니의 몸 속에서 오랫동안 절여진 냄새였어. 아주 튼튼한 냄새였지. 할머니의 몸 냄새는 내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빨아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내 몸에 스몄어. 주인집 부엌의 오래된 장작 아궁이나 구들장 밑에서 나는 냄새 같았어. 햇볕이 쟁쟁 내리쪼일 때 오래된 밭에서 솟아오르는 흙냄새 같았지. 

나는 정신없이 할머니의 가슴이며 아기의 겨드랑 틈에 주둥이와 코를 들이박고 킁킁거렸지. 내가 태어나서 가장 기쁘고 가장 크게 놀란 날이었어. 나는 혀를 길게 빼서 아기의 입언저리를 핥았어. 핥았는데,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부드러운 아기 입술의 느낌만 내 혓바닥에 와 닿았어. 미칠 드싱 행복한 느낌이었지. 나는 내가 개라는 걸 잊어버리고 자구만아기의 목덜미며 머리통을 핥았어. 그러자 아기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돌렸어. 나는 개였어. 그걸 내가 까먹고 있었던거야. 

- 이 더러운 놈아, 저리 가. 할머니는 나를 품에서 떼어내 밀쳐냈어. 나는 깨갱, 비명을 지르며 마당 위로 나동그라졌지.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있던 그 짦은 동안에, 사람의 몸 냄새는 내 일생 동안 잊지 못할 느낌으로 내 몸 속에 깊이 들어와 박혔어. 새로 태어난 사람의 냄새와 오래 산 사람의 냄새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그날 알았어. 사람의 몸 냄새 속에 스며 있는 사랑과 그리움과 평화와 슬픔의 흔적까지도 그날 모두 알게 되었지. 그 냄새는 모두 사랑받기를 목말라하는 냄새였어. 

그날은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하루였어. 한꺼번에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가슴이 터져나갈 지경이었지. 신바람이 뻗쳐서 하루 종일 쩔쩔매면서 이리 뒤고 저리 뛰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