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 조씨, [병자일기: 노부인, 일상을 기록하다](옮긴이 박경신), 도서출판 나의시간, 2015.
남평 조씨(1574~1645): 조선 인조 때에 좌의정을 지낸 춘성부원군 시북 남이웅의 부인으로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17세에 결혼해서 56년을 해로하였으나 자식 4남1녀를 모두 일찍 잃었다. 병자호란 때에 남이웅이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고 이후 소헌세자를 수행하여 심양에 억류된 동안, 홀로 집안을 이끌며 그 전후 4년(병자년 1636~ 경진년1640) 가까이 매일 한글로 일기를 써 남겼다.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봉곡에 부부 묘소가 있다. 최근에 그들 신주 뒷면에 새겨진 남평 조씨의 실명(조애중)이 발견되었다.
(13~16쪽)
병자년(1636)
(날짜 미상) ……… 미싯가루나 풀어먹으려고 하였는데 판관댁의 종을 만났다. 함양댁이 농막에 와 계신다고 하여 사람을 보냈더니 판관댁이 나와 계셨다. 함께 그 마을에 들어가 함양 댁 종의 집에서 잤다.
(12월16일) 판관댁 행차와 세 집이 일행이 되어 고족골 종의 집에 가니 시간이 신시 쯤 되었다. 판관댁은 용인으로 가시고 우리 두 집 행차는 하루 더 묵으면서 김보에 간 귀중한 짐과 글월이나 가져오고 근처의 곡식을 모아 양식이나 찧어서 출발하려고 하였더니 저물 때에 일봉이가 남한산성으로부터 나오면서 영감의 편지를 가져왔다. 그 편지에 기별하시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짐붙이는 생각지도 말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청풍으로 가라고 하셨다.
쉬고 있던 대복에게 삼경(밤11~1시) 쯤에 길을 나서니 덕생이는 그렇게도 울면서 함께 가겠다고 하였으나 아이를 낳게 되었으니 길을 가다가 아이를 낳으면 죽을까 하여서 거기 있는 종에게 피란하라고 하였다. 양식이 많이 있으나 다 두고 다만 쌀궤 하나를 가지고 오다가 상자는 다 거기에 묻었다.
(12월 17일) 날이 새도록 길을 가니 서리와 눈이 말 위에 온통 얼어 붙었다. 청호 큰길에 다다르니 군사들이 오른다고 하므로 청호 작은 길로 오다가 걸어오던 두 집의 종 여덟 명과 난추와 천남이를 길을 잘못 들어 잃고 아침이 되도록 찾지 못했다. 길마다 피란하는 사람들은 끝이 없고 길이 여러 방향으로 났으니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온 집안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웠다. 마을에 들어가 아침밥을 먹고 종들을 다 흩어서 찾으나 찾지를 못하니 갑갑하고 민망하기를 어찌 다 말하랴. 그렇게 하다 보니 청풍으로 가는 길은 늦어가는데 주인이 말하기를 도적이 벌써 그쪽 방향으로 갔다고 하니 그쪽으로는 갈 엄두도 내지 말라고 하거늘 진위의 감찰 댁을 찾아들어가니 시간은 이미 한낮이 지났다. 잃은 사람들을 아직까지 찾지 못하여서, 우리 행차가 그 집에 들어가고 그쪽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왔다. 저희도 밤이 세도록 길을 가서 아침밥도 못 먹고 행차와는 헤어졌으니 애가 타서 진위 고을 앞에까지 갔었다고 하였다. 잃었던 사람들은 찾았으나 시간은 벌써 저녁때였다. 날이 저물었으니 서로 애를 쓰며 지내고 청풍으로 가는 것은 이미 틀렸다고 하여 감찰댁 일행과 함께 피란하기로 하였다.
(12월 18일) 길을 떠나서 평택에 있는 엄동이의 집에 왔다. 난추의 다리가 온통 부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므로 거기서 묵었다. 감찰이 나추에게 침을 주었다. 또 장흥고골의 유생원댁이 와서 잤다. 잠깐 만나 보았다.
(12월 19일) 눈이 많이 왔다. 난추가 아파서 거기서 묵었다. 비록 소경인 종이지만 어리석지 않아서 정성으로 우리 일행을 대접하니 종이라고 하는 것이 곳곳에 우연하지를 않다.
(12월 20일) 길을 떠나서 유생원댁은 온양으로 가고, 우리는 신창으로 가니 길에서 서로 헤어짐이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유생원댁은 청양으로 피란하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신창일대에 있는 종 한눌의 집에 가서 거기서 잤다.
(12월21,22일) 눈이 많이 와서 거기서 묵었다. 밤이 되어서야 판관댁 행차가 도착하였다.
(12월 23일) 길을 떠나서 신평 방축을 지나서 긴마루라고 하는 곳에서 집을 정해 들어서 밤을 지냈다.
(12월 24일) 오목이에 있는 유생원 댁에 가서 아침밤을 먹고 즉시 당진으로 가려고 하였더니 아침비도 오고 사촌들이 하도 친절하고 정답게 대접하며 묵었다 가라고 하므로 두 행차의 위아래 사람과 말이 다 함께 묵었다. 음식과 술과 안주를 형님 댁과 똑같이 하여 주셨다. 통틀어 사십여 명의 사람들이 몽땅 거기서 묵었다. 그러니 거기서는 많은 비용을 들이고 두 집의 사람과 말은 아우 두 댁에서 겪느라고 비용을 많이 들이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12월 25일) 거기서 길을 떠나니 두 집 일행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고마워하였다. 하도 극진히 대접하여 주시니 못내 감격스러웠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형님 댁을 우리와 똑같이 대접하여 주시니 더욱 기뻤다. 판관댁과 감찰댁 행차는 덕산으로 가시면서 판관댁은 당진으로 오시겠다고 하셨다. 이날 당진 읍내 호장인 박상의 집에 가니 주인의 어미가 팥죽을 한 동이 쑤어서 주고 술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먹게 하였다. 심진사 댁에서 저녁밥과 떡과 술을 장만하여 계집종이 가지고 왔다.
(12월 26일) 심진사 댁에서 식사를 하였고 종들은 석희에게서 밥을 먹었다. 심진사의 별실(작은집)이 약주를 하여 와 다녀갔다. 심진사가 찾아와서 문안을 드리신다. 거리가 거의십리나 되는데도 찾아주시니 고맙다. 영감의 벗님네들이 우리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여주시니 이는 영감이 그분들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요사이는 거기 머물고 있다. 이해도 저물어가는데 남한산성에서의 기별은 아득하니 애가 끊어지는 듯하여 망극망극하다. 정신은 있으나 어찌 다 기록하리. 생각나는 족족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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