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기, [각자도사 사회], 어크로스, 2023.
(8~11쪽)
죽음은 개인적인 경험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매개된 현상이다. 예컨대 내가 요양원, 요양병원, 호스피스, 대학병원에서 현장 연구를 할 때 만난 사람들은 죽음에 관심이 많았다. 수년째 아버지를 요양병원에서 간병하던 한 보호자는 자살을 빈번하게 생각했다. 어느 의사는 치료를 중시하는 의대 교육을 받고 돌봄이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한 간호사는 근무시간에 수십 명의 환자와 보호자를 상대해야 하는 일터가 살인적이라고 말했다. 간병인과 요양보호사는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도 모르게 노인을 학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자기 검열을 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요양원 노인은 “더러운 꼴 안 보고 깔끔하게 죽고 싶다”며 눈물을 보였다. 요양병원에서 수년째 어머니의 간병을 하던 아들 내외는 “고령화 시대에 안락사 제도는 꼭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은 ‘존엄한 죽음’보다 ‘깔끔한 죽음’을 원했다. 깔끔한 죽음을 존엄한 죽음이라고 여겼다. 몸을 ‘생산가능’ 여부로 판단하고, 돌봄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며, 제도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곳에서 희망할 수 있는 죽음이란 신속하고, 정확하고, 효율적인 자살이나 안락사였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의 문제는 마치 주사위 놀이같다. 먼저 ‘보이지 않는 손’이 노화, 질병, 돌봄, 죽음을 새긴 주사위를 던진다. 그 결과는 ‘우연히’ 누군가의 일상에 들이닥친다. 각자 그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또 다른 주사위를 던진다. ‘행운’을 기대하면서 던지는 주사위다. 최대한 천천히 늙기를, 덜 아프기를, 깔끔하게 죽기를 바라며, 또 착하고 경제력도 갖춘 가족이 나를 잘 돌보기를, 다정하고 친절한 의료진을 만날 수 있기를, 말 잘 통하고 헌신적인 간병인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주사위를 던진다. 그런데 ‘만약’ 주사위던지기의 결과가 나쁘거나, 더 이상 던질 주사위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사위 놀이는 양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하나는 우연, 운, 기회, 가능성을 뜻하고, 또 하나는 투기, 모험, 위험, 사행성을 의미한다.
혹자는 말한다. “각자의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누구나 ‘평등’하게 받아들일 뿐이다”라고. 그런 주장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주사위 놀이는 얼핏 보기에는 평등한 것 같지만 사실은 불평등한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주사위 놀이의 인기 비결은 불평등함에 있다.
우리 삶이 불평등하면 할수록 주사위 놀이는 ‘아찔한 모험이자 ’합리적 투기‘가 되어 세간의 관심을 끈다. 반면, 어떤 주사위를 던져도 누구나 존엄하게 살고, 늙고, 아프고, 죽을 수 있다면 그 놀이는 시시한 장난에 그칠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죽음은 의료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의 문제에 가깝다. 죽음은 개인적인 일인 동시에 내가 사는 일상,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이야기로 국한할 수 없는 문제다.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이야기로 국한할 수 없다.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론 보도에 등장하는 명의, 신약, 의료 기술, 자기 개발 담론에 귀 기울이는 만큼 왜 사람들이 일하다가 죽고, 가난해서 죽고, 학대로 죽고, 고립으로 죽고, 차별로 죽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사건 사고‘가 어떻게 나의 노화, 질병, 돌봄, 죽음과 연결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전환해 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존엄한 죽음은 어느 장소에만 있는 것도,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존엄한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는 과정에, 그리고 두툼한 생각으로 채워진 해답지는 만드는 데 이 책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22~27쪽)
집은 좋은 죽음을 보장하는 장소인가
환자와 돌봄 제공자의 삶의 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집안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애 말기 돌봄은 대개 집안일로 시작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집안일을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하여야 하는 여러 가지 일, 빨래, 밥하기, 청소 따위”로 정의한다. 집에서 ’독립적‘으로 살던 사람이 생애 말기에 타인에게 먼저 ’의존‘하는 것이 이 집안일이다. 사전은 집안일과 어울리는 ’집안사람‘이 누구인지도 알려준다. 바로 아내( 집 ’안에‘ 있는 사람)다. 예나 지금이나 집안일은 대개 여성의 역할로 여겨진다. 생애 말기 돌봄에서 이 집안일은 차츰 간병뿐만 아니라 집안 분위기까지 고려해야 하는 감정 노동으로도 이어진다. 집안일이 생애 말기 돌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까지 대다수 한국인이 집에서 임종했다는 사실은 바꿔 말하면 집에서 주로 여성(할머니, 어머니, 며느리, 아내, 딸 등)이 환자를 위해 이 집안일을 도맡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시작부터 생애 말기 돌봄은 성별 분업에 기반했고, 집 안에 고립되어 있었다. 공적 돌봄과 복지의 공백은 개인(가족)의 ’도리‘ ’효‘ ’천성‘ ’사랑‘과 같은 언어와 실천으로 메워졌다.
1995년 박완서의 소설 [환각의 나비]는 이러한 사회적 흐름의 폐해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 작품에서 딸네와 아들네는 치매 노모 부양으로 첨예한 갈등을 겪는다. 이 불화의 중심에는 노인이 “아들이 있는데도 딸네에 의탁하거나 거기서 죽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치욕이라는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노부모는 ’결혼한 아들 집에 있는 여자(며느리)‘의 돌봄을 받도록 권장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딸네에 있었던 노모는 아들네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딸은 아들네에서 눈칫밥을 먹는 노모가 내내 마음에 걸린다. 딸은 다시 자기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기로 한다. 소설 속 노모는 그렇게 딸네와 아들네를 전전하며 자신을 잃어간다.
한편 ’산업역군‘으로서 남자들이 바깥일을 무탈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여자들은 ’현모양처‘로서 집안일(여기에는 생애 말기 돌봄은 물론 출산과 육아도 포함된다)을 하도록 고무됐다. 여성의 가사노동을 비가시화하고 남성 노동자에게만 임금을 주는 사회구조는 산업화를 싸고 빠르게 이륙하는 데 효율적이었다. 자연스레 생애 말기 돌봄은 ’집사람이 공짜로 하는 집안일‘이라는 인식과 경험이 사람들의 일상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공적 의료보험과 요양보험을 비롯한 사회제도의 확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 증가 등의 사회적 흐름은 생애 말기 돌봄을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돌봄 노동은, 앞서 언급했듯이, 전문성이 필요 없는 집안일로 여겨졌고, 시장에서 그 가치가 낮게 매겨졌다. 오늘날 생애 말기 돌봄은 대개 여성이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하는 일이 됐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안에 들어와 있어도 요양보호사들의 노동조건은 비참하고, 제도 밖에 있는 간병인은 저임금인 데다 사회보험의 사각 지대에 있는 살정이다. 요양보호사의 돌봄은 노인장기용등급을 받은 ’어르신’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한편, 건강보험에 간병급여가 빠져 있기 때문에 병원에서의 간병은 보호자가 하거나 환자가 간병인을 직접 고용해서 해결해야 한다. 불안정한 노동 의료 복지 구조 속에서 요양보호사 간병인, 환자, 보호자 모두 위태로이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가령 간병인은 병원 내의 코로나19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24시간 환자의 손과 발이 되고 있지만 산재보험이나 고용보험을 적용받지 못한다. 대개 간병인은 근골격계 질환 등에 시달리고 있고,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요양보호사들 또한 고강도 육체노동과 다양한 폭력(예컨대 노인들의 침 뱉기, 욕하기, 꼬집기 등등)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사람들이 이들을 ‘아줌마’로 호칭하는 것은 돌봄 노동을 여전히 집안일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생애 말기 돌봄의 형성 과정(젠더와와 시장화)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돌봄 수해자의 삶 또한 취약하게 만든다. 언론에서 고발하는 시설 내 노인 학대나 환자 소외의 본질을 노동자의 도덕성이나 전문성 결여가 아니라 흔들리는 삶의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 존엄한 돌봄과 임종을 희망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운(가족운, 간병인운 등등)이 좋아야 한다. 생애 말기 돌봄 앞에서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도생 혹은 각자도사하고 있다.
집은 생물학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역동성을 품고 있는 장소인데도 ‘사적 영역’이란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환자의 몸과 집을 둘러싼 관계망은 개인 사정으로, 돌봄 제공자의 노동은 집안일로 치부됐다. 집 안에서 시작되는 질병 간병 돌봄 서사가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병원 치료나 ‘구제’와 같은 사유가 필요했다. 예컨대 [아빠의 아빠가 됐다]의 저자 조기현 씨가 치매 걸린 아버지를 집에서 홀로 7년간 돌보다가 결국 주민센터를 찾았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사려 깊은 공감과 위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버지와 자신이 공적 돌봄을 받을 만큼 ‘아프고 불쌍한’ 사람들인지 각종 서류로 증명하라는 요구였다.
이제껏 정부는 이러한 집 안의 목소리들을 공적 담론으로 확대하고 다양하게 수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가구나 세대라는 통계적 단위로 표준화했고, 수급자나 부양의무자 따위의 행정적 인격으로 대상화했으며, 질병의 문제로 여기며 의료화했다. 그렇게 집 안의 구체적 목소리들은 ‘사적’이라는 이유로 힘을 잃었고, 집 밖의 특정한 기준들은 ‘공적’이라는 이유로 활개를 쳤다.
집을 둘러싼 이 ‘양극화’가 생애 말기 돌봄을 곤경에 빠뜨렸다. 환자 곁에서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회적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가뜩이나 옹색하고 시혜적으로 보이는 공적 돌봄을 받기 위해서 환자는 자신의 몸과 집의 비참함을 증명해야 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환자는 집에 고립되거나, 군말 없이 요양원 또는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환자의 일상은 열악한 돌봄 노동조건에 따라 출렁인다. 이런 맥락을 제쳐두고 생애 말기 돌봄과 죽음을 다시 집으로 끌고 오자는 주장은 허망하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커뮤니티 케어’가 특정한 기준으로 선정한 환자 집에 비대면 의료 기기를 설치하고, 문턱을 제거하고, 가끔 사회복지사나 의료인이 방문하는 사업은 아닌지 우려된다. 집에서 죽으면 ‘좋은 죽음(혹은 자연사)’이고 시설에서 죽으면 ‘나쁜 죽음(혹은 객사)’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존엄한 죽음은 집 그 자체가 아니라 공적 세계에 울려 퍼지는 ’집 안의 목소리들‘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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