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어크로스, 2018(2017 초판)
(9~12쪽 )
책상 위에 던져둔 스마트폰에서 ‘문라이트’의 배리 젠킨스 감독과 터렐 앨빈 맥크레이니 작가의 라디오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다. ‘문라이트’는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의 서민 공동주택 단지에서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성장한 감독과 작가의 기억이 강하게 반영된 이야기다. 부모에게 방치되고 또래에게 괴롭힘 당하는 내성적 주인공 샤이론은 열 살 되던 해, 후안이라는 동네 마약상 아저씨를 만나 보살핌을 받는다. 3부로 구성된 영화가 샤이론의 10대를 그린 2부로 넘어가면 후안은 이미 죽고 없다. 맥크레이니는 소년 시절 자신을 아들처럼 돌봐주었던 블로라는 마약 딜러로부터 후안의 캐릭터가 비롯됐다고 밝힌다.
작가는 생부의 집에 다녀온 어느 주말 어머니로부터 블루가 라이벌 마약상의 총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아저씨는 눈 깜박하는 사이에 소년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그날부터 주의를 기울이자고 결심했어요. 내가 없으면 세계도 없다는 걸,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소중한 좋은 것들이 사라져버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15초 앞으로’ 버튼을 눌러 맥크레이니의 이 말을 다시 들으며 옮겨 적는다.
주시하지 않으면 영화는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본 것을 적어두지 않으면 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는 두려움은 2010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시네21]에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를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한 동력이었다. ‘김혜리의 영화 일기’가 아니라 볼썽사납게 소유격이 두 개가 들어간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여야 한다고 고집부린 까닭은 이 저널의 제1저자는 내가 아니라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의 일기’를 쓰는 나는 다만 매일 영화가 보여준 것을 적어두는 속기사였다. 2010년 8월 30일에 쓴 첫 번째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일기를 쓰기로 한다. 나의 일기가 아니라 영화의 일기다. 영화관의 어둠에 잠겨 수천만 번째 태초의 빛이 스크린에 떨어지길 숨죽여 기다릴 때마다 나는 다시 한 번 살아보기를 결심하고 있다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 영화에 아무런 기대가 없을 때조차. 그래서 영화의 일기를 쓰기로 한다. 영화를 보는 마음이란 격류에 밀리고 내던져지는 오갈 데 없는 피조물의 기분인 동시에 살아 있음을 가장 능동적으로 실감하는 고양된 상태다. 영화, 우리의 대낮 같은 밤, ‘데이 포 나이트(Day for night)’. 이것은 그저 영화를 보는 자의 출납부와 비슷한 기록이 될 것이다.”([씨네21] 771호)
보고 듣는 행위는, 내가 우연히도 잡지 기자를 업으로 삼아 영화에 집중하기 전까지 시각과 청각이 기능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면 하기 마련인 다분히 소극적인 활동이었다. 그러나 극장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동안이 내 삶에서 가장 감각이 활성화되고 타인을 공정하게 판단하고자 노력하고 세계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낱낱이 실감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사태는 역전됐다. 사물과 개인은 현실과 달리 프레임 안에서 하나하나 뚜렷한 나머지 나를 최고로 감정적인 동시에 이성적인 상태로 밀어갔다.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가장 살아 있다고, 잠시 더 나은 인간이 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좀 더 오래 소유하고 싶어서 영화가 아직 내 안에 흘러다니는 동안 쓰고자 했다. 영화가 내게 다가와 쓰다듬고 부딪히고 할퀸 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이를테면 ’인증 숏‘를 남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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