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낯선 이방인의 한국 수목 사랑의 기억…… 태안, 천리포수목원

이춘아 2023. 6. 9. 22:55

오경아, [정원의 기억], 궁리, 2022.

(271~278쪽)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정원

"충분히 음미할 시간을 가지세요.
조용한 구석을 찾아도 좋습니다. 
펼쳐진 풍경에 감동하겠지만, 
내면의 깊은 울림도 함께 느껴보세요.
당신의 내면 안으로 무엇인가 들어오고,
당신의 영혼을 건드리는 느낌이 있을 겁니다. 
단순히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예쁜 꽃을 보는 것 이상의 정원이 느껴질 겁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1001개의 정원]이란 책의 서문을 쓴 영국의 정원 전문가 앨런 티치마시의 글을 인용해봅니다. 요즘 우리에게도 정원 문화가 새롭게 다가 오고 있죠. 꽃피는 때에 꽃구경을 가고, 단풍이 드는 철에 단풍구경을 가던 문화가 이제는 식물원과 수목원을 찾는 문화로 발전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중,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인 래 스팬서-존스가 한국의 정원으로 창덕궁 후원과 함께 선정한 서해안 천리포에 있는 천리포수목원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그 전에 수목원이라는 개념부터 좀 알고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우선 수목원보다 상위 개념인 식물원은 식물을 키우고 전시하며 연구하는 기관을 말합니다. 오늘날 개념의 식물원이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1545년에 문을 연 이래 지금까지도 원형의 모습을 상당히 보존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파두아 식물원’입니다. 식물을 속과 명으로 구별하고 식물의 특징을 유전적으로 연구하며 아름답게 배치하고 키워서 많은 사람들이 식물을 통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적으로 조성하고 있는 식물원의 개념도 이 목적을 벗어나지 않고 있고요. 이 식물원 유형 중에 딱딱한 줄기를 지니고 있는 식물군, 흔히 수목 혹은 나무로만 한정을 둔 경우를 특별히 ‘수목원’, 영어로는 ‘Arboretum’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식물원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때는 1833년, 영국의 식물학자인 존 클라우디우스 라우든이 쓴 책 [가드닝 사전]에서였죠.  형태적으로 수목원은 특별히 어떤 특정 수종을 수집하게 될 경우, 그 식물의 과학적 속명을 따라서, 상록침엽수를 모은 수목원을 ’파이네텀‘, 참나무를 모은 곳은 ’쿼에르세타‘, 버드나무의 경우는 ’살릭세타‘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수목원으로 ’홍릉‘과 ’광릉수목원‘을 꼽습니다. 그런데 이 두 수목원 모두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 만들어졌는데요. 홍릉은 명성황후의 능을 옮긴 자리에, 광릉은 조선왕조 7대 왕인 세조의 사녕터였다가 훗날 여기에 세조가 묻히면서 생겼는데, 바로 여기에 임업시험장을 만들면서 시작됩니다. 이 두 임업시험장의 목적은 수목의 유전자를 분류하고, 목록작성, 분석 등의 일을 했고요. 그러다 1987년, 88올림픽을 앞두고 이 두 곳을 수목원으로 격상시키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광릉수목원은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 산림청에서 관할하는 중이죠.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1001개의 정원]의 저자 래 스펜서 존스는 왜 개인이 설립한 천리포수목원을 가 볼 만한 곳으로 넣었을까요? 홍릉, 광릉 국립수목원도 있는데요. 물론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인 판단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분석이나 어떤 기준이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이 수목원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 무엇인가 이곳에 특별함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천리포수목원은 1945년 미24군단 정보장교로 한국에 파견 근무를 온 칼 페리스 밀러가 조성한 수목원입니다. 원래는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 만든 곳은 아니고, 한국과 한국의 식물이 좋아서 서해안 천리포에 땅을 구입하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곳이예요. 훗날 밀러는 한국인으로 귀화해 민병갈로도 불립니다. 민병갈은 원예나 정원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자신만의 정원 철학은 확실했죠.  ’식물 자체가 주인이 되는 정원‘을 표방했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 수형을 잡거나 억지로 약을 치고 간섭하는 행위를 가급적 하지 않았죠. 거기엔 식물뿐만 아니라 식물과 함께 더불어사는 거미와 곤충 같은 동물에 대한 존중도 잃지 않았고요. 그래서 생전의 민병갈 원장은 다니는 산책길을 막는 거미줄조차도 걷어내지 않고 피해서 다녔다는 일화가 있죠.  하지만 그의 이런 정원 철학보다 더 깊은 천리포수목원의 매력은 바로 식물 수집에 있습니다. 현재 천리포수목원에는 420여 종의 목련나무, 270여 종의 호랑가시나무, 250여 종의 무궁화나무, 380여 종의 동백나무, 200여 종의 단풍나무가 있습니다. 정말 지독할 정도의 관심과 열정, 재력이 없이는 개인의 힘으로 이렇게 같은 종의 식물을 모으는 일은 현실적으로 정말 힘든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천리포수목원이 보이는 풍경과 달리 세계적으로 식물 관계자들에게 각광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천리포수목원을 다녀갔던 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못 봤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목련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이 중요한 나무들을 억지로 인위적으로 모아서 심지 않고, 천리포수목원 곳곳에 산발적으로 심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천리포수목원은 반드시 발걸음을 뗄 때마다 나무에 달려 있는 명찰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수집 수목인 목련은 무리지어 심어져 있지만 보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건 워낙 귀한 목련들이 심어져 있다 보니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어서인데요. 목련꽃이 피는 4월 한 달 정도 예약한 회원만 관람이 가능합니다.  그럼 이제 천리포식물원의 가장 대표적인 정원, 목련원부터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목련이 이 지구에 나타난 것은 약 9500만 년 전쯤입니다. 현재 화석으로 발견된 목련나무가 약 200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는데요. 이게 어떤 의미인지 보자면 호모 샤피엔스인 우리 인류의 출현을 약 30만 년 전으로 보니까, 인류보다 300배가 넘는 시간을 산 식물인 겁니다. 원래 목련 속의 공식 과학명은 ‘매그놀리아’인데요. 이 이름은 17세기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식물학자인 피에르 마뇰의 이름에서 비롯됐어요. 이 목련의 자생지는 좀 뜬금없이 떨어져 있기도 한데요. 주요 지역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열대지역인 서쪽 인도네시아 그리고 뚝 떨어져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분포하고 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식물의 자생지는 기후에 의해 비교적 같은 지역에 묶일 때가 많은데, 이렇게 여러 대륙으로 떨어져 살게 된 이유는 아마도 이 식물이 탄생했던 아주 오래전 지구는 한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게 시간이 흘러 대륙이 조각이 나 떨어져나가면서 이런 분포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매그놀리아는 상록으로 잎이 떨어지지 않는 에버그린과 낙엽이 지는 타입으로 분류가 됩니다. 지금 현재는 약 200여 종이 남아 있고, 여기에서 파생된 품종이 500여 종 있어요. 그런데 천리포수목원 420 품종이 있으니 정말 대단한 수집인 셈입니다. 민병갈원장은 이 400여 종의 목련이 꽃을 피우는 4월이면, 다른 약속도 잡지 않고 수목원 머물렀다고 해요. 목련꽃을 새들이 쪼아 먹을까싶어 그물을 쳐서 꽃을 보호해줄 정도였다고도 하고요. 

목련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또하나의 식물은 바로 ’호랑가시나무‘입니다. 이 호랑가시나무의 공식 과학명은 ’일렉스‘인데요. 이 식물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크리스마스 카드에 잘 등장하는 뾰족한 잎을 지닌 ’홀리나무‘를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그 잎이 바로 호랑가시나무 잎입니다. 

일렉스는 전 세계에 약 560여 종이 분포하고 있고, 자생지는 아열대와 온대 기후에 걸쳐 있어서 목련과 마찬가지로 잎이 지지 않는 상록과 낙엽이 지는 종이 모두 있죠. 그리고 나무의 형태가 매우 다양해서 키가 작은 관목, 더러는 긴 줄기로 감아서 올라가는 덩굴 형태도 있습니다. 이 중 370여 품종이 천리포수목원에서 자라고 있어서, 아주 잘 정리된 식물의 명찰을 잘 살펴보면, 정말 보기 힘든 세계 여러 자생지의 일렉스와 멸종 위기인 우리나라 자생의 호랑가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설립자 민병갈 원장은 200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40년 동안 이 수목원에 나무를 심고 보존하는 일로 인생을 바쳤습니다. 현재 천리포는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죠. 낯선 곳의 이방인으로서 지극히 한국과 한국 식물을 사랑했던 그 마음이 과연 무엇이었을지는 잘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학교를 ’정원학교‘라고 칭하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강조했죠.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면 절대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다.” 또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정원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쾌락”이라고 했고요. 아마도 한국인 민병갈로 끝맺은 그의 인생도 많은 철학자들이 외쳤던 그런 삶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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