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미술관을 좋아하게 될 당신에게], 초록비책공방, 2023.
(59 ~ 63 쪽)
비엔날레의 특징은 동시대성과 탈지역주의라고 이야기해봤는데요. 또 짚고 넘어갈 것이 비엔날레와 아트페어의 차이점입니다. 먼저 비엔날레는 아트페어와 달리, 현장에서 미술 작품을 사고팔 수 없습니다. 상업적 목적은 없지만 비엔날레가 미술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큰 편입니다. 굵직한 비엔날레에 참여하면 시장에서 작가의 작품 가격도 함께 오르는 경우가 있거든요.
가장 유명한 건 베니스 비엔날레이지만 특색있고 유의미한 비엔날레도 많습니다. 국내에서는 청주공예비엔날레가 떠오르네요. 이름에서 예상되듯 공예를 중심으로 한 전시와 행사가 펼쳐집니다. 2021년 제12회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주제는 ‘공생의 도구’였습니다. 공예품을 일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친근한 사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석했어요.
청주공예비엔날레 개최 장소인 문화제조창은 1940년대에 지어진 큰 담배공장이었는데 산업화에 밀려 2004년 가동이 중단되고 현재는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엔날레에 맞춰 ‘청주국제공예공모전’도 열리는데, 여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공예품만 대상이 아니고 아이디어, 즉 기획도 공모 대상이란 점이에요. 마침 제가 이 공모전의 SNS 홍보를 하게 되었는데 기획자와 기획자의 역량을 재화로 인식한다는 점, 그 주제가 지역 예술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답니다.
국내 비엔날레 중 하나 더 소개할게요.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바다미술제’입니다. 바다미술제는 1987년부터 88 서울올림픽의 프레올림픽(공식 올림픽이 열리기 전 시험삼아 진행되는 비공식 대회) 문화 행사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는데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부산비엔날레에 통합되어 개최되다가 2011년부터는 독립된 미술제로서 열리고 있답니다. 현장에서 작품이 거래되지 않는다는 점, 전시 주제와 내용이 동시대성과 탈지역주의를 내포한다는 점, 격년으로 열린다는 점에서 비엔날레의 성격을 띤 미술 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1년 바다미술제는 <인간과 비인간: 아상블라주>라는 제목으로 부산 일광해수욕장에서 열렸는데요. 일광해수욕장은 부산 시내와 떨어져 있어 광안리, 해운대보다 차분한 느낌의 바다였어요. 바다미술제의 묘미는 탁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모래사장 위에 설치된 미술 작품 사이를 배회하며 감상하고 추억을 남기는 것입니다.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져 그 위로 햇살이 비치는 모습은 아무렇게나 찍어도 사진이 참 잘 나와요.
비엔날레는 전시관을 따라 자연스럽게 떠나는 여행과 같습니다. 2021년 제 13회 광주비엔날레는 광주비엔날레전시관, 국립광주박물관, 광주극장,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구 국군광주병원, 은암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문화재단까지 총 8개의 장소를 전시관으로 지정했습니다. 여길 전부 돌아본다면 광주를 한 바퀴 돌아본 느낌일 거예요.
지도에서 각각의 전시관을 찾아보고 동선을 파악하며 관람 순서를 정합니다. 가는 길 사이에 있는 맛집도 찾아봐요.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과 비슷하죠? 저는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오느라 전시관 모두를 가볼 수는 없었어요. 이럴 때는 메인 전시관을 포함해 꼭 가보고 싶은 두세 군데를 골라 동선을 짭니다. 무리해서 보는 것보다 가능한 범위에서 충분히 즐기는 것이 더 근사한 추억이 되거든요. 그래도 커미션 작품이 있는 공간은 꼭 방문하기를 추천합니다. ‘커미션’이란 비엔날레의 주제에 맞는 새로운 작품을 작가에게 의뢰하는 것을 말해요. 비엔날레를 위한 작품이 탄생하는 거죠. 오직 현장에서만 감상할 수 있으니 전시장을 찾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저는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작품을 전시한 ‘구 국군광주병원’이 가장 인상에 남았어요. 시오타 치하루의 <신의 언어>, 마이크 넬슨의 <거울의 울림(장소의 맹점, 다른 이를 위한 표식)>, 이불의 <태양의 고시>, 임민욱의 <채의진과 천 개의 지팡이>처럼 새로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긴 여운이 남은 작품은 임민욱 작가의 <채의진과 천 개의 지팡이>였습니다.
빛 한 줄기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 지팡이가 마구잡이로 놓여있어요. 구석에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죠. 누운 지팡이들을 지나 커튼 하나를 걷어 내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 갑자기 눈부신 햇살이 잔뜩 쏟아지는 복도가 펼쳐집니다. 복도 양옆으로 수백, 수천 개에 가까운 지팡이가 놓인 것을 볼 수 있어요.
이 작품은 한 끔직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949년 문경 석달 마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죠. 당시 생존자였던 채의진 작가는 평생을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애썼습니다. 지팡이는 채의진 작가가 생전에 희생자들을 기리며 만든 거였어요. 이 지팡이를 임민욱 작가가 모아서 설치 미술로 재탄생 시켰습니다.
그는 지팡이가 어두운 방에 위태롭게 숨어있다가 밝은 빛을 받게끔 동선을 설계함으로써 희생자들의 상처가 취유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더는 제구실할 수 없는 폐업한 병원과 오랜 역사의 아픔이 한 공간에서 만나니 마음이 더 먹먹해지더구요. 사건을 알리려면 뉴스도 필요하지만 예술도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아니였다면 처참했던 이 사건을 평생 몰랐을 테니까요.
의미 깊은 커미션 작품까지 봤다면 비엔날레의 절반을 즐긴 겁니다. 이제 광주의 맛집과 카페를 방문해봐야죠. 광주를 떠나기 전 ‘손탁앤아이허’라는 북카페를 찾았어요. 예술 서적이 있는 인테리어가 멋진 곳이었어요. 2층 소파에서 조용히 비엔날레 핌플릿을 다시 읽었습니다. 전시를 되뇌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참 좋더라고요. 잠깐의 여유 덕분에 비엔날레 경험이 근사한 여행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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