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464

낭독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

2020. 5. 24(일) 목성균, [누비처네], 2010, 연암서가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 지금은 다 산이 되었지만 강만돌 어른이 살아 계실 때는 윗버들미의 유지봉 넓은 산자락에는 따비밭들이 누덕누덕 널려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는 사랑간에 한방 가득 장정들이 모여서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달빛이 방문을 하얗게 적시면 “달 떴네” 하는 좌장 말에 놀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사랑 마당 가득한 지게에서 제 것을 찾아 지고 유지봉 따비밭으로 올라갔다. 아직 바심(타작)을 못하고 가려 놓은 채 있는 뉘 집 서슥(조) 더미를 울력으로 져내리기 위해서다. 강만돌 어른네 따비밭의 서슥 더미를 헐어서 한 짐씩 짊어 놓고 앉아서 내려다보던 푸른 달빛이 어린 골짜기. 풀어 널은 명주 자치처럼 달빛..

낭독 "조선낫과 왜낫"

2020. 5. 23(토) 목성균, [누비처네], 2010, 연암서가 “조선낫과 왜낫” 조선낫과 왜낫이 낫이라는 사실만으로 동류인식될 수는 없다. 꼭 국적이 다르기 때문이라기보다 외양처럼 판이한 그 성품 때문이다. ‘조선낫은 진중하고 왜낫은 경박하다.’ 조선낫에 대한 편향적 지적일까. ‘조선낫은 미욱하고 왜낫은 지능적이다.’ 그리 말하니 조선낫을 천하게 보는 것 같아서 싫다. 그러면 상식적으로 말하자. ‘조선낫은 무겁고 왜낫은 가볍다.’ 사용의 효율성에 착안한 연장의 상반된 차이가 국민성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조선낫은 대장간에서 대장장이가 무쇠를 녹여서 벼려 내는 수제품이다. 대장장이의 솜씨에 따라 낫의 모양이나 성질이 가지각색이다. 모양새가 뭉툭하든가, 넓적하든가, 날이 좀 무르든가. 좀 강..

낭독 가을 - 13

2020. 5.20(수) [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이세진 옮김, 2019, 청미) 가을 11월 7일 토요일 1시 반 즈음에 서재 방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안락의자에 앉아 따뜻하게 비치는 햇살을 음미하고 있었다. 어디서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그 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우리 집 앞에서 멈춘 것 같았다. 우체부가 왔나? 아니, 오늘은 벌써 왔다 갔는데, 자동차 문 열리는 소리. 또 다른 문이 열리는 소리. 또 그 소리. 여러 사람의 목소리와 ... 개 짖는 소리. 맙소사, 딸과 사위와 손자들과 그 집 개가 왔구나....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현관 앞에 나가서 주말에 온다는 얘기를 듣고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고 솔직하지만 애처롭게 고백했다. 딸은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이 양손을 떨구었..

낭독 "다랑논"

2020. 5. 17(일) 목성균, [누비처네], 2010, 연암서가 “다랑논” 올망졸망 붙어 있는 다랑논배미들을 보면 흥부네 애들처럼 가난하고 우애 있어 보인다. 나는 어려서 팔월 열나흘 저녁 때면 쇄재골 다랑논 머리에 서서 추석 차례를 지내러 오시는 작은 증조부를 기다렸다. 그 어른은 칠십 노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훠이훠이 쇄재를 넘어 오셨다. 나는 저문 산골짜기에 혼자 서 있었다. 그래도 무서운 줄을 몰랐다. 막 저녁 세수를 한 산골 처녀의 맨 얼굴 같은 들국화꽃, 조용히 귀 기울이면 들리는 열매가 풀숲을 스치며 떨어지는 소리, 미처 어둡기도 전부터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 나는 그 가을 정취에 취해서 무섭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나 좀더 철이 들고 나서 알았지만, 내가 무섬증을 느끼지 않고 조신..

낭독 "찔레꽃 필 무렵"

2020. 5. 16(토) 목성균, [누비처네], 2010, 연암서가 “찔레꽃 필 무렵” 찔레꽃이 피면 나는 한하운처럼 울음을 삭이며 혼자 녹동항에 가고 싶어진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누런 보리밭 사이로 난 전라도 천릿길을 뻐꾸기 울음소리에 발맞추어 폴싹폴싹 붉은 황토 흙먼지 날리며 타박타박 걸어가고 싶다.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서러운 길인지 알고 싶다. 찔레꽃 하얗게 핀 산모퉁이 돌아서 “응야 차 -, 응야 차 -“ 건강한 젊은 육신들이 꺼끄러기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보리타작하는 소리 질펀한 동네 앞, 둥구나무 아래 앉아서 발싸개를 풀어 볼 것이다. 발가락은 다 있는지 - . 구태여 그게 무슨 대수일까마는 그래도 궁금한 사람의 마음을 어찌 당하랴. 발가락은 다 있다. 일그러진 문둥이의 얼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