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자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춘아 2023. 9. 2. 03:51

랠프 레이턴(엮음), [클래식 파인만](김희봉 홍승우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8(2008 초판).

(11~ 17 쪽)

서문: 프리먼 다이슨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딕(리처드 파인만의 애칭)의 목소리를 듣고 딕의 몸짓을 본다. 파인만의 친구들은 모두 파인만의 이야기를 테이프에 담고 책으로 펴낸 랠프 레이턴에게 빚을지고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이다. 이 이야기에서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첫 번째 맞은 공식 차 파티 때 딕에게 여주인이 차에 크림을 넣을지 레몬을 넣을지 묻는다. 그는 ‘둘 다‘ 넣어 달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딕의 성격의 본질적인 핵심을 담고 있다. 그는 모든 것에 “예스”라고 대답했다. 그에게는 크림도 좋고 레몬도 좋으며, 희극도 좋고 비극도 좋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그렇게 많은 미친 듯한 모험을 했고 그렇게도 창조적인 삶을 살았다. 파인만은 고질적인 질병과 요절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더 크게 겪었지만, 모든 비극에는 희극의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극의 영웅도 때때로 잠시 물러나서 어릿광대에게 자기 자리를 내준다는 것이다. 비극의 한가운데에서 파인만이 제정신으로 버티기 위해서는 어릿광대짓이 도움이 되었다. 코넬 대학교에서 전자의 무한한 자기에너지와 씨름하거나 플로리다에서 우주 왕복선 챌린저 호 참사의 원인을 밝히려고 전력을 다할 때도 또 앨버커키에서 죽어가는 젊은 아내 알린의 병상을 지킬 때처럼 가장 심각한 순간에도 그는 침울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다. 

이 서문에서 내가 이야기하려는 주제는 파인만의 엄청난 연구 열정이다. 파인만이 직접 들려준 이야기와 다른 사람들이 파인만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들을 속이는 장난을 하고 재미난 모험을 즐기는 데에 쓰고, 아주 가끔씩만 강력하게 집중해서 과학에서 빛나는 발견을 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인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그의 인물 됨에서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그의 인생에서 중심 주제는 길고 느린 고된 연구다. 그는 여러 가지 과학문제를 꾸준히 공격해서 풀릴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나아갔다. 모험과 우스개는 진짜로 있었던 일이지만, 그것이 주요 주제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들은 잘못된 생각을 심어 줄 수도 있다. 과학에 대한 파인만의 공헌과 그의 스타일에는 역설적인 어긋남이 있기 때문이다. 파인만의 과학 스타일은 빛났고 인상주의적이었다. 그는 불투명한 미분 방정식이 아니라 투명한 그림으로 자연을 설명했고,칠판을 가득 메운 비의적인 기호가 아니라 극적인 몸짓과 온갖 의성어를 동원해서 강연했다. 

그러나 그의 과학의 본질은 보수적이었다. 그는 기존의 이론과 실험을 세심하고 고되게 음미해서 자신의 통찰에 도달했다. 일순간의 빛나는 발명으로 거기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그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가능한 최소한의 것들을 조금씩 버리면서 기존 이론을 새로운 실험에 맞도록 확장했다. 그는 옛것의 토대 위에 벽돌을 하나씩 쌓아서 자신의 새로운 이론을 구축했다. 그가 만든 것 중에서 서둘러 구축한 것은 하나도 없고, 이 모든 것들은 세월의 시험을 견디고 서 있다. 그가 자주 말했듯이 새로운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제안되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멋지냐보다는 얼마나 올바르냐가 더 중요하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가 물리학의 기초를 다시 만들든 새로운 실험 결과를 해석하든, 그는 끊임없이 세세한 것들을 바르게 하려고 고심했다. 그는 과학자의 일은 자연이 하는 말을 자세히 듣는 것이지 자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물리학자로서 파인만의 삶에는 매우 창조적인 시기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로 지속된 10년은 1939년에서 1949년까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시작해서 로스앨러모스 때문에 잠시 방해를 받고 코넬 대학교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두 번 째도 역시 1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1960년에서 1970년까지 칼텍(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있던 시기이다. 프린스턴-코넬 시기에 그는 원자와 빛과 그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 대한 이론을 자신의 방법으로 재구성했다. 칼텍 시절에 그는 강하게 상호 작용하는 입자와 핵력에 대한 이론을 재구성했다.두 시기 동안 그는 수많은 혼란스러운 실험 결과들로부터 자연의 정합적인 작동 방식을 끌어냈다. 그는 가능한 한 기존 이론에 의존하지 않았고, 최대한 실험적 사실들에만 의존했다. 그는 한 조각 한 조각 마치 조각 그림 맞추기를 하듯이 수백 가지의 조각을 맞춰서 수백 가지 배열 방식을 다 해 보고 나서야 딱 맞는 배열을 찾아냈다. 가능한 배열들 중에서 나중에 정합성이 없거나 틀렸다고 알려질 것들을 확인하는 데 그는 몇 년을 보냈다. 

과학자로서 파인만의 위대함은 어떤 특정한 발견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의 위대함은 전 세계 모든 물리학자들이 현재 이야기하는 언어를 그가 창조했다는 사실에서 볼수 있다. 그의 ‘시공간 접근’과 ‘도식적 그림’은 이제 자연의 작용 방식을 서술하는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시공간 접근의 본질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했던 “모든 것은 흐른다.”는 말을 그대로 잡아낸다. 시공간 접근에 따르면, 자연은 초기 상태에서 최종 상태를 향해 동시에 가능한 모든 역사를 통해 흘러간다. 모든 가능한 역사에는 진폭이 있고, 진폭은 크기와 위상을 가진다. 최종 상태에 도달할 확률을 계산하려면, 모든 역사의 진폭을 더해서 제곱하기만 하면 된다. 각각의 역사에 대응하는 진폭은 그 역사를 서술하는 일련의 그림들의 기여를 합쳐서 계산한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역사의 총합’ 서술은 과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통일 원리이다. 

물리적 실재에 대한 파인만의 역사의 총합 그림은 철학적으로도 심오하고 실용적으로도 쓸모가 있다. 이것을 이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빠르고 쉽게 계산할 수 있고, 또한 물질과 운동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관념이 왜 틀리는지에 대해서도 심오한 통찰을 준다. 파인만은 자연의 작용 방식이 우리의 상상보다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이상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역사의 총합 그림은 자연의 이상함에 대한 직접적이고 생생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파인만에게는 언제나 계산이 먼저였고, 철학은 그다음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세한 것까지 바르게 하는 것이었다. 

물리적 실재에 대한 그의 역사의 총합 그림처럼, 인간 본성에 대한 파인만의 통찰은 철학적으로 심오하고 실용적으로 쓸모가 있다. 그의 이야기들 중 몇 가지는 그의 물리학만큼이나 심오하다. 파인만의 인간적인 면을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첫 번째 아내 알린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파인만 자신이 직접 말로 서술한 이 이야기는 [남이야 뭐라 하건!]에 실려 있다. 이것은 이 책에서 가장 긴 이야기이며, 파인만이 이야기하기에 가장 힘든 것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파인만의 영혼은 알린과 함께 빛난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生)은 명(命)이다!  (0) 2023.09.15
일시적인 경험을 신경계의 지속적인 변화로 바꿔야한다  (42) 2023.09.07
키티 오펜하이머  (6) 2023.08.23
오펜하이머  (15) 2023.08.18
과학적으로 생각하기  (3) 2023.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