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 버드, 마틴 셔윈,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 북스, 2023.
(7~ 10쪽)
오펜하이머는 1904년에 태어나 1967년에 죽었다. 그는 63년의 일생 동안 핵무기의 개발과 세계사의 대전환을 낳은 과학 혁명에 주요 인물로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로스앨러모스 과학연구소의 소장직을 맡았다. 뉴멕시코 주에 위치한 로스앨러모스의 비밀연구소에서는 원자 폭탄의 설계와 첫 실험이 이루어졌고, 그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와 과학행정가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변화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의 물리학 교수였던 1930년대에 그는 공산당 활동에 깊이 관여했던 자유주의 성향의 공산당 동조자 이기는 했지만 한번도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없었다. 전쟁 후 오펜하이머는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자문위원회의 의장직을 비롯한 여러 정부 자문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는 결코 고분고분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제도권 과학자로서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 시기의 활동으로 보아 그는 “군축의 아버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1953년 무렵이 되자 오펜하이머는 수많은 정적들을 만들게 된다. 미국이 핵무기에 대한 의존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의회, 군부를 비롯해 막 임기를 시작하던 아이젠하워 행정부 내에서 미국이 핵 능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세력이 동맹을 결성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들은 눈엣가시 같은 오펜하이머를 모든 정부 자문위원회로부터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핵 증강 동맹은 1930낸대 당시 오펜하이머의 사회활동들과 전쟁 직후 군비 축소를 옹호했던 그의 주장들을 증거로 그가 친소파인 것이 분명하며 정부 자문활동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FBI는 오펜하이머를 정치적으로 공박하기 위해 8,000쪽이 넘는 증거 자료를 수집했다. 그 증거들 중에는 불법 도청 기록과 뻔뻔한 거짓말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증거를 살펴보면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라 미국의 애국자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전쟁 직후 오펜하이머는 핵무기의 존재가 미국에, 나아가 전 세계에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핵 독점은 유지될 수 없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다른 과학자들과 같이, 그는 소련이 3~5년 안에 미국의 핵 독점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역시나 소련은 그들의 첫 원자폭탄을 1949년 8월에 만들어 냈다). 핵을 보유함으로써 미국이 안전을 지킬 수 있으리라는 환상은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미지근한 물속에 담긴 개구리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은 서서히 데워졌고 개구리는 자신이 삶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물이 뜨거워지면서 개구리는 점점 불편해졌지만, 스스로를 구하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던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폭격이 있고 나서, 원자 폭탄의 아버지는 핵무기라는 미지근한 물속에서 뛰쳐나왔다. 그해 9월,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 직에서 사임했다. 10월에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에 대해 호소하면서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946년 1월에 그는 국무부 장관이 소집한 위원회 일원으로 원자력 에너지의 국제 통제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참여했다. 이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는 핵무기의 전면적인 철폐에 있었다. 오펜하이머 계획의 기본 전제는 세계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세계 각국의 정부들이 핵무기를 철폐하기 위한 계획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 무기들은 점점 확산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다시 사용되리라는 것이었다.
지난 63년 동안에 오펜하이머의 음울한 예측이 실현될 뻔한 사건이 몇 차례 있었다. 가장 위험했던 사건은 1962년 10월 미국과 소련이 핵충돌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그 전에도 핵무기를 사용할 뻔했던 사건이 한국 전쟁 중에 있었다. 한국전쟁 중에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진공해 오자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핵무기의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요청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와 핵무기는 핵 시대 초창기에 처음 만났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핵무기의 재회는 1970년대에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대한민구그이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반 시설을 갖추기 위한 비밀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핵무기를 개발하려던 포부와는 관계없이) 그가 암살당하면서 끝났다.
오펜하이머는 전쟁 직후 미국인들에게 핵무기를 의지만 있다면 비교적 값싸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투입된 막대한 노력과 자금에 비추어 봤을 때 터무니없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얼마 전 가난하고 고립된 국가인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국제, 과학, 문화, 상업의 주류에서 고립되어 있고, 심지어 자국민을 먹여 살리는데조차 실패한 국가가 핵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는 핵무기의 전 세계적 확산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맥히 보여 주는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1946년에 주장했듯이 핵무기의 철폐는 문명의 생존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선결 과제이다. 전 세계적으로 냉전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핵 대결은 여전히 공포스러운 현실로 남아 있다. 오펜하이머는 핵확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날 그는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관리체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늦게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를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오펜하이머가 1946년에 제안했던 핵무기 국제통제 계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5 ᆢ 그는 대단히 인간적이었다. 다면적이었던 것만큼 유능했고, 순진했던 것만큼 명석했다. 사회 정의를 위한 열정적인 운동가이면서 고삐 푸린 핵무기 경쟁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막강한 정적을 얻게 된 정부의 자문역이었다. 그의.친구 라비가 말했듯이 그는 "대단히 현명하지만 그보다 더 멍청할 수 없었다."
51 ᆢ 고등학교 2학년 때 오펜하이머는 오거스트 클록의 물리 수업을 들으며 인생의 큰 결단을 내리게 된다. " 나는 첫해 수업을 듣고 너무 들떠서 여름방학 동안 그와 함께 다음 학기 화학 수업을 위한 실험기기 준비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 나는 화학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화학은 물질의 본질을 다루는 학문으로,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 일반적인 이론 사이의 관계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물리학에서도 물론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기란 훨씬 어렵지요."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의 길로 자신을 안내해 준 클록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기지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발견할 때 경험하게 마련인 시행착오 자체를 즐겼고, 그것을 통해 학생들에게 희열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66ᆢ 하버드에서의 첫해가 끝날 무렵 오펜하어머는 화학을 전공하기로 택한 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내가 화학에서 좋아하던 것들이 사실은 물리학에 더 가까운 것들임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물리화학이나 열역할 또는 통계역학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 더 깊이 파고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들은 매우 오묘한 것이었어요. 하지만 나는 기초 물리학 과목조차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미 화학 전공자로 분류된 상태였지만 그는 그해 봄 물리학과에 대학원생 과목을 듣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자신이 물리학에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그는 물리학 책 15권의 제목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모두읽었다고 주장했다.
67: 오펜하이머가 물리학을 배우는 방식은 무계획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기초적인 내용은 모두 건너뛰고 가장 흥미롭고 추상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듬성듬성한 물리학 지식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78: 오펜하이먼가 케임브리지의 캐번딧 연구소에 도착한 것은 전 세계 물리학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1920년 초, 닐스 보어와 비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등 유럽의몇몇 물리학자들이 양자 물리(또는 양자 역학)라는 이론을 만들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양자 물리는 분자와 원자 크기의 매우 작은 규모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적용되는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양자 이론은 곧 수소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 같은, 원자보다 작은 규모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고전물리학을 대체하게 될 것이었다.
114: 오펜하이머가 괴팅겐에서 썼던 첫 번째 논문은 양자 이론을 이용해 분자 밴드 스펙트럼의 주파수와 세기를 측정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는 양자 역학 이론이 관찰 가능한 현상들을 “조화롭고 일관적이며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때문에 새로운 이론의 “기적”에 사로 잡혀 버렸다.
115: 오펜하이머처럼 하이젠베르크 역시 어떤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묘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젊은이였고, 그의 빛나는 지성은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오펜하이머는 확실히 하이젠베르크와 그의 작업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직 앞으로 그들이 중대한 라이벌이 될 것임은 알지 못했다. 1927년에 그는 양자 역학에서의 하이젠베르크가 이룬 성과를 발판으로 연구를 하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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