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키티 오펜하이머

이춘아 2023. 8. 23. 14:51

카이 버드, 마틴 셔윈,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 북스, 2023.

(248~ 262쪽 )

1938년 8월 어느 날 오펜하이머는 파티에서 키티 해리슨이라는 29세의 유부녀를 만났다. 키티는 “나는 바로 그날 오펜하이머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어떻게든 그 사실을 숨기려고했다.”라고 썼다. 그녀는 어려운 일을 겪기도 했지만, 금방 실패를 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키티는 변화무쌍한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피츠버그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도 못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독일과 프랑스로 떠났다. 이후 두어 해 동안 그녀는 뮌헨 대학교, 소르본, 그레노블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의 카페에서 음악가들과 함께 보냈다. 키티는 “나는 학교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어요.”라고 회고 했다. 1932년 그녀는 당시에 사귀고 있던 보스턴 출신의 젊은 음악가 프랭크 램세이어와 충동적으로 결혼했다. 몇 개월 후 키티는 남편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렘세이어의 일기장에 따르면 그는 마약 중독자에다 동성애자였다. 그녀는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와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3년 12월20일에 위스콘신 법원은 외설 행위를 이유로 결혼 무효판결을 내렸다. 

열흘 후 키티는 피츠버그의 신년 파티에서 그녀의 친구 셀마 베이커는 자신이 진짜 공산주의자를 만났다며 키티에게도 만나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키티는 “우리가 진짜 공산주의자를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만나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녀는 부유한 롱아일랜드 사업가의 아들인 26세의 조 달레트를 만났다. 키티는 “조는 나보다 세 살 많았습니다.”라고 기억했다. “나는 그 파티에서 그와 사랑에 빠졌어요.” 만난 지 6주도 되지 않아서 그녀는 달레트와 결혼식을 올리고 그를 따라 오하이오 영스타운으로 갔다.  달레트는  “그녀가 자신처럼 당에 충성심을 갖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딜레트가 보기에 키티는 “노동 계급의 태도를 체화하지 못한 젊은 중산층 지식인”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키티는 그의 비하하는 듯한 태도를 경멸했다. 2년 반 동안의 극빈 생활 끝에 그녀는 별거를 선언했다. 그녀는 “가난함 때문에 점점 더 우울해졌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마침내1936년 6월에 그녀는 아버지가 있는 런던으로 떠났다. 

1937년 초, 달레트는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들에 대항해 싸우기로 결심하고 공산당 여단에 자원했다. 그는 오랜 동지인 스티브 넬슨과 함께 1937년 3월 정기 순양함 ‘퀸 메리’호에 올랐다. 달레트는 넬슨에게 자신과 키티가 곧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달레트와 넬슨은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4월에 재판을 받고 20일간의 구금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다. 달레트는 4월 말에야 비로소 스페인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키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을 사랑해. 어서 알바세테에 도착해서 당신의 편지를 받아 볼 날만 기다리고 있어”라고 썼다. 7월 무렵까지도 그는 여전히 흥분된 말투로 자신의 경험을 전했다. “대단히 흥미로운 나라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내가 그동안 했던 대단히 흥미로운 일들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일이야. 파시스트들에게 한방 먹이는 기분이라니.”

전황은 공화주의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달레트의 부대 역시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공군과 포병 지원을 받던 스페인 파시스트 부대에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레트가 곧 알게 되었듯이, 스페인 좌파 세력은 사나운 내부 투쟁으로 인해 더욱 약화된 상태였다. 그는 엄청난 고통을 참으며 참호 쪽으로 기어 돌아오려 했지만 두 번째 기관총탄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넬슨(그 역시 8월에 부상당했다.)은 달레트의 사망 소식을 파리에서 들었다. 달레트는 죽기 직전에 키티에게 편지를 써서 넬슨이 파리에 들를 것이라고 전했다. 키티는 그를 만나기 위해 런던에서 파리로 갔다. 그녀는 파리에서 달레트를 만나 그와 함께 스페인으로 갈 생각이었다. 슬픈 소식을 전해야 했던 넬슨은 “그녀는 쓰러져서 나에게 매달렸습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조의 대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터뜨렸지요. 나 역시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키티는 27세의 공산당 전쟁 영웅의 과부 신분으로 미국에 돌아왔다. 미국 공산당은 그의 희생이 잊혀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1938년 초에 그녀는 친구를 만나러 필라델피아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하고는, 봄 학기부터 펜실페니아 대학교에 등록했다. 그녀는 화학, 수학, 생물학을 공부했고, 마침내 대학 졸업장을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해 봄 그녀는 청소년 시절에 알고 지내던 영국 출생의 의사 리처드 스튜어트 해리슨을 만났다. 그는 영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가 미국에서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인턴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정치 문제에 무관심했던 해리슨은 키티가 절실히 원하던 안정적인 생활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키티는 다시 한번 충동적으로 1938년 11월23일 해리슨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나중에 해리슨과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실패작“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 친구에게 이것은 ”견딜 수 없는 결혼“이며 자신은 오래전부터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라고 말했다. 키티는 1939년 6월에 식물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29세가 되어서야 키티는 마침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준비가 된 듯했다. 비록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계속하고는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만의 경력을 쌓을 결심을 했다. 그해 여름 UCLA의 대학원 과정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그녀는 박사 학위를 목표로 하고 있었고, 식물학 교수가 되려는 꿈을 가졌다. 

1939년 8월에 그녀는 해리슨과 패서디나에서 열린 어느 야외 파티에서 오펜하이머를 처음으로 만났다. 이후 몇 달 안에 그들은 다시 만났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1940년 여름의 끝자락에 오펜하이머는 해리슨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두 남자는 오펜하이머와 키티가 결혼할 수 있도록 해리슨이 이혼을 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데 동의했다. 해리슨은 나중에 FBI에게 “자신과 오펜하이머 부부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일로 인해 모두가 성에 관해 현대적인 입장을 가지고있음을 알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키티는 임신 중에도 생물학 연구를 계속했고 친구들에게 자신이 식물학자로서 경력을 쌓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서버는 1940년 여름의 열정적인 불륜 관계를 직접 목격했지만, 오펜하이머로부터 10월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여전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결혼 상대가 진인지 키티인지 잘 몰랐다. 양쪽 모두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다른 남자의 아내를 빼앗았다는 사실에 몇몇 친구들은 아연실색했다. 오펜하이머는 바람둥이는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성들에게 강하게 끌리는 남자였다. 그는 키티에게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1940년 11월1일자로 이혼판결을 받았고, 바로 그날 그녀는 네바다 버지니아 시티에서 오펜하이머와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 증명서에는 법원 청소원과 서기가 증인으로 서명했다. 이 신혼부부가 버클리로 돌아올 무렵에 키티는 이미 임부복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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