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머튼, [칠층산](정진석 옮김), 바오로딸, 2022(2019 초판).
32: 나는 아버지한테서는 사물을 바로 보는 태도와 고결한 성품을, 어머니한테서는 혼잡한 세상에 만족하지 않는 고요함과 다재다능한 성품을 물려받았다. 부모으로부터 일하고 관찰하며 즐기고 표현하는 훌륭한 능력을 물려받은 것이다.
34: 아버지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름은 오언 머튼이다. 할아버지는 음악가요 독실한 사람으로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크라이스트처치 시의 크라이스트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35: 아버지가 미술 공부를 하기 원했을 때 그의 앞길에는 숱한 어려움이 놓여 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침내 런던으로 갔고, 거기서 다시 파리로 건너갔다. 파리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한 후에는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미국인이었다. 어머니는 늘 걱정스러운 표정이었고 정확하고 부지런했으며 내 일을 얼마나 꼬치꼬치 캐물었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회상해 보면 어머니는 꿈 많은 성격에 완벽해지려는 커다란 야심으로 무엇이나 빈틈없었던 것 같다. 집 안을 예쁘게 꾸미는 일부터 시작해서 그림 춤 살림 자녀양육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허술한 곳 없이 완벽을 추구했다. 어쩌면 그래서 어머니는 늘 염려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되는지도 모르겠다.
36: 아버지는 자신의 꿈 때문에 피레네로 왔다. 아버지의 꿈은 사실 철저한 것만을 추구하는 어머니의 이상보다 훨씬 단순하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이었다. 경치 좋은 지방에서 가정을 이루고 그림을 그리면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꿈의 전부였던 아버지는 프랑스에 정착하고 싶어했다. 우리는 몹시 가난했다.
41: 그림 그리는 일로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었던 아버지는 전쟁 동안 정원사로 일했는데 솜씨가 좋아서 일거리가 많았다. 동네 부잣집들의 정원을 설계해 주고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성실한 노동으로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훌륭한 정원사였다. 꽃을 알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잘 자라게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그림 그리는 것만큼이나 이 일을 좋아했다.
44: 전쟁이 끝나자 뉴질랜드에 사시는 친할머니가 지구 정반대편인 영국과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녀들을 만나보려고 오셨다. 할머니의 방문에 대해 내가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거의 없지만 할머니가 남기고 간 깊은 인상은 존경과 경외심과 사랑이었다.
45: 자기 아이들이 어떤 과오를 범하거나 비겁하고 추한 인간이 될까봐 소심증에 걸릴 정도로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던 나의 부모가 정작 종교 교육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추측건대 어머니는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어머니는 그 시대의 제도적 교회는 자기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지성적 완성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플러싱에 있는 교회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46: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퀘이커교 신자여서 오래된 만남의 집에서 신자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신봉하던 종교는 이뿐이었다. 종교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어머니 방침이었다.
48: 나는 이렇나 독서를 통해 막연하게나마 종교와 철학의 단편 지식을 무의식중에 쌓아 나갔고, 급기야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이것들은 마침내 하나의 사상 체계를 이루어 나를 복종을 거부하는 반항아로 만들었고, 끊임없이 변하는 어떤 자유로운 세계를 늘 갈망하게 만들었다.
51: 아버지가 더글라스톤의 성공회 성당에 오르간 연주자로 취직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인 1921년 일이었다. 그러나 그 직장은 아버지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신부와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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