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 [서포만필](심경호 옮김), 문학동네, 2012(2010년 초판).
역자 머리말
김만중(1637~1692)의 [서포만필]은 에세이 모음집이다. 상권은 104항, 하권은 165항이다. 김만중은 경학 역사 문학, 유가 불가 도가 등 삼교, 천문 지리 음양 산수 율려, 근대 과학 등 다양한 주제를 이 단편 논문집에서 다루었다. 만필의 형식으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고, 개방적인 시선으로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았다.
김만중은 1687년(숙종13) 선천 유배지에서 에세이를 하나하나 집필하기 시작해서 남해 유배시기인 1689~1692년에 그것들을 하나로 묶은 듯 하다. 이 에세이 모음집은 인쇄되지 못하고 필사본 형태로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읽혔다. 이본이 여럿 전하는데, 내용상 차이는 없고 원래의 에세이 수를 줄이거나 순서를 바꾸고 간혹 다른 글자를 사용했을 뿐이다. 이본들은 대개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하권의 중간까지는 경학이나 통감학 등 학문적인 문제를 다루었고, 하권의 후반에서는 주로 시평을 기록하였다.
김만중의 종손인 김춘택이 말했듯이, [서포만필]의 내용은 “앞사람들이 펴 보이지 못한 것들을 펴 보였다.” 곧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자치통감]의 역사기록을 근거로 경학상의 쟁점을 논증하고, 불교와 주자학 및 주자의 학문 태도에 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조선의 역사 지리를 고증하고 국난의 경과를 고찰하는 한편, 중국문학과 조선 한문학의 작품에 대해 비평했다. 그렇기에 [서포만필]은 17세기 말 시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회의와 탐구의 정신을 담았으며,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관용의 관점을 드러냈다.
김만중은 거대 담론이나 이념을 동어반복하지 않고 세세한 사실을 해부하면서 지식을 심화시켰다. 유가와 불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속류 주자학자들과는 달리 그 성립을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했으며, 불교를 무조건 배척하는 풍조에 대해 전제의 오류를 통박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상대주의적인 견해를 당당하게 피력했다는 점 때문에 이 에세이모음집은 한국 지성사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김만중은 문화 및 문학 비평에서도 상대주의적 관점을 지켰다. 중국 시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한편, 한국 시의 장점을 적시했다. 나아가 민족문학론의 추형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서포만필]은 김만중이 만년에 이르러 일생의 경륜과 지적 모색과정에서 얻은 지성의 정수를 집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일종의 지적 모험이 될 것이다. 논증적 에세이가 방출하는 지성의 형광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기기를 바란다.
ㆍ ㆍ ㆍ ㆍ ㆍ ㆍ
94: 조조와 유현덕
조조가 형양 전투에서 패했을 때, 가령 조홍의 구원이 없어서 죽었다 하더라도 어찌 한나라 왕실의 충신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천자를 허하로 옮겨가게 한 것은 공허함을 버리고 오한전한 실질을 취한 일로, 국가 계책으로서 당연했다. 이때 원술과 원소는 한창 강성하고 조조의 세력은 확장되지 않았으므로, 제나라 완공과 진나라 문공이 대순에 의탁하여 사해(천하)를 복종시켰던 자취를 모방하려 했던 것이니 어찌 갑자기 찬탈의 모의를 했겠는가?
조조가 한나라 황제를 처음 섬길 때에는 예를 잃은 적이 없어서, 동탁이 공경을 도륙하고 비주를 겁탈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천제가 갑자기 동승과 모의하여 조조를 처치하려 했으니, 경망함이 심했다. 이때부터 군신 간의 세력은 둘 다 온전할 수가 없게 되어 조조는 급속하게 왕망과 동탁의 전철을 밟게 되었다. 그러자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조조가 한나라 왕실의 적이 될 것을 알았고, 지사와 인인들도 조조에게 편드는 자가 없었다. 물론 공문거처럼 자부심이 대단하여 조조에게 맞섰던 자는 말할 것도 없었고, 조조의 측근에서 조언을 해서 대업을 이루게 도왔던 순문약 같은 자도 명의(명분과 의리)를 아끼고 두렵게 여겨서 달가운 마음으로 독약을 마셨다. 천하는 셋으로 나뉜 이후로 조조가 늙어 죽을 때까지 안정될 수 없었다. 동승의 계책은 정녕 한나라 왕실의 패망을 재촉하기에 족한 것이었지만, 조조가 천하를 통일할 수 없었던 것도 전적으로 거기서 유래된 것이지, 적벽 전투에서 패하고 나서야 일이 결판이 났던 것이 아니다.
유현덕은 재기 면에서는 손책만 못하고, 선전 면에서는 여포만 못하며, 강대함 면에서는 이원(원술, 원소)만 못하다. 그런데도 조조가 유독 그를 두려워한 것은 어찌 까닭이 없었겠는가?
동승은 용렬한 사람이었거늘, 계책을 세워 어찌 감히 조조를 제거하려고 꾀했겠는가? 이것은 모두 유현덕이 은근히 부추긴 것이다. 당시 허하 사람들 가운데 오직 동승만 구신이었다. 따라서 자연히 동승은 한나라 왕실을 보호하고 있다는 공덕을 자부했기에, 필시 산직(정한 사무가 없는 벼슬)으로 밀려난 데 대해 앙앙불락하고 있으리라 계산해서 유현덕이 그 점을 이용해 동승을 격동시킨 것일 뿐이다. 게다가 유현덕은 동승이 능히 성사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 아니다. 단지 그를 이용하여 군주와 신하 사이를 이간시켜서 조조로 하여금 천하에 악명을 짊어지도록 하고, 자기는 홀로 서 패 지역에서 초연해 있어 그 재앙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조가 유현덕을 두려워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역사의 기록에는 동승이 ‘헌제에게 의대 속에 밀조를 받았다’ 고 했다. 그 밀조도 필시 황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평설): 서포는 조조와 유비가 동탁의 난 때 한나라 왕실의 유지를 위해 행한 사적을 검토했다. 통설로는 조조가 한나라 왕실의 권한을 찬탈하려했다고 하지만, 서포는 조조가 왕실을 허 땅으로 옮겨가게 한 것은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려 한 실질적인 계책이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오히려 유현덕이야말로 헌제의 장인 동승을 부추겨서 군신의 사이를 이간시키고 조조가 왕망과 동탁의 전철을 밟게 만들었다고 논했다. 결국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혼란스럽게 된 것은 유현덕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삼국의 정립과 촉한의 성립에 관한 통념을 부정하고,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의리명분론과는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 것이다.
210: 조조, 제갈량, 사마의의 용병술
조맹덕, 제갈공명, 사마중달(조맹덕은 위나라 무제 조조(155~220), 제갈공명은 곧 제갈양이다. 사마중달은 진나라 선제로 추존된 사마의(179~251)를 가리킨다)의 용병술과 방략(어떤 일을 꾀하는 방법과 계략)은 서로 같지 않은 듯하지만, 역시 대적하는 자가 어떠한가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조조의 병법이 특히 권모(임기응변에 능한 계략)에 뛰어나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대개 이원 여포 한수 장로 같은 무리를 속임수로 우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갈공명의 [후출사표]에서 언급했듯이 조조는 네 번이나 소호(안휘성에 있는 호수)를 넘어가서 망루를 쌓고 중모(손권)와 대치하게 되자 땅에 경계선을 그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다. 이것은 제갈공명과 사마중달이 위빈에서 서로 대치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제갈공명이 칠종칠금한 일이나, 사마중달이 맹달을 사로잡고 공손연을 참수한 것으로 말하면, 어찌 귀신이 바람을 일으키고 우레를 일으키는 격이 아니었던가?
(평설): 서포는 조조, 제갈량, 사마의의 용병술과 방략을 비교해, 큰 차이는 대적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달려 있고, 실제로는 서로 능력이 같다고 했다. 도덕주의적 관점을 배격하고 실제 현실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그렇게 논평한 것이다. 조조는 권모술수에 뛰어나 원술 여포 한수 장로를 속임수로 우롱했다. 한편 제갈량은 맹획을 칠종칠금하고 사마의는 공손연을 참수해 ‘귀신이 바람을 일으키고 우레를 일으키는’ 신출귀몰한 병법을 과시했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 하늘과 새 땅 (4) | 2024.03.19 |
---|---|
나, 이웃, 지구 살리기 (22) | 2024.03.17 |
오직 근심해야 할 것은 (17) | 2024.02.22 |
생명을 바라보는 각각의 시각 (1) | 2024.02.22 |
잠 들지 못하는 사회 (24) | 2024.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