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새 하늘과 새 땅

이춘아 2024. 3. 19. 09:08

공지영,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해냄출판사, 2024(2023 초판)


(298~301쪽)
이 글을 읽고 나서 내가 무슨 말을 중얼거렸던가. “미쳤어, 미쳤어…….“  나는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십자가의 성 요한을 알게 되었다. 맨발의 갈멜 수도원의 수사였던 사람. 

“어느 날 예수님께서 내게 오셔서 말씀하셨지. 네가 나를 위해 수많은 고초와 시련을 겪은 것을 알고 또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니 요한아,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이런 기회가 또 없다. 이 세상을 달라고 하지는 못할 망정 솔로몬처럼 지혜라고 해도 되고 혹은 평화라고 해도 될 터였다. 그것도 참 좋은 것 아닌가. 나 같으면 믿음이라고 대답할 것 같았다 - 내게 이런 질문을 하실 리가 없지만 - 그것도 좋은 것들 아닌가. 그런데 십자가의 성 요한은 대답한다.  “모욕과 멸시요.”

아직도 기억나는데 나는 이 구절을 읽다가,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마음속에서 비명도 나왔다. 이건 너무한 것 같았다. 이 사람들 무슨 피학대 취미가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게다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다른 성인들은 거의 겪을 수 없는 엄청난 시련을 이미 겪고 난 후였다. 

나중에 신앙의 선배를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선배도 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선배도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이 말을 하고 하루 종일 혼자서 중얼거렸다고 했다.  “미쳤어, 미쳤어.”

우리는 약간의 안도를 나누며 웃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갔다. 내 마음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그 구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 후로 터무니없는 모함과 모욕, 그리하여 오는 멸시를 겪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모욕을 달라고 기도는 못 해. 모함과 모욕을 주시니 어쩔 수 없이 겪는 거야 하는 수 없지만.”

그렇게 시간이 또 지나갔다. 내 기도가 길어지고 내가 평화로울수록 내가 매일 새벽미사를 가고 단식을 하고 기도 지향을 가지고 금주를 지켜낼수록 마음속에서 아주 은은하게 교만이 자라났다. 어느날 호미질을 하다가 깨달았다. 내가 이럴진대, 프란치스코나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 속에서 자라는 영적 교만을 어찌 몰랐을까. 게다가 그는 예수님을 뵙는 분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교만에 대한 최고의 약은 아마도 눈앞의 모욕일지도 모른다, 하고. 

그래서 겨우 그 구절을 해결하던 무렵 그보다 한술 더 뜨는 샤를 드 푸코를 만났다. 

그가 지향했던 가난, 그는 인생을 송두리째 거기에 바쳐 낮은 자가 된다.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거기에 비참까지 곁들인다. 그에게 이런 메모가 있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벌거숭이로 땅바닥에 넘어져 피투성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잔혹하게 순교 당할 것을 생각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오늘이기를 바라라. 이 무한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충실하게 십자가를 지거라. 너의 생애는 바로 이 같은 죽음에 다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여라. 
    - 샤를 드 푸코, [사하라의 불꽃] 이것은 그가 신부가 되기 전 나자렛에 있을 때부터 그에게 들려온 목소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죽었다.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두 손과 두 발이 묶여 알몸인 채로 총상을 입고 구덩이에 던져져 오랜 시간 후에 프랑스 군인들에게 발견되었다. 

산골에서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면서 나는 가끔 ‘내가 아프거나 다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을 했다. '그때 아무도 없으면 나는 어떻게 하지.’ 그런데 십자가의 성 요한은 메모에 이런 것을 썼다.  “마지막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기를 바랄 것.”

샤를 드 푸코는 한술 더 떠서 처참하게 살해될 것을 각오하며 그것을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어 자신을 바치는 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위의 모든 사람들이 내게는 이해되지 않았다. 절벽보다 더 높은 벽 같았다. 감히 따라하려고 생각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이해도 어려웠던 분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분명히 어떤 도전은 있었다. 

그분들은 우리의 모든 세계를 뒤집어엎어 전혀 다른 차원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가난을 칭송했고 모욕을 열망했으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영예로 삼았다. 인류가 태어난 이래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이것이 혁명이 아니면 무엇이 혁명이라는 말일까. 권력자가 바뀌는 따위의 혁명은 이미 오래전에 실패하고 말지 않았던가. 그것이 내가 푸코의 자취를 찾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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