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생명을 바라보는 각각의 시각

이춘아 2024. 2. 22. 21:37

캐럴 계숙 윤, [자연에 이름 붙이기](정지인 옮김), 윌북, 2023.


173: 
괴상한 분류법과 이름들을, 말하자면 ‘잘못된 분류‘들을 보게 될거라 예상했건만 곧바로 내가 예상한 모든 것을 한참 넘어서는 것들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아주 즐거운 괴상함이었다. 사실 너무나 많은 것이 이상해서 인류의 대부분이 생명의 세계에 관해 한 말은 내가 보았거나 알았던 생명의 세계와는 우주 하나만큼이나 동떨어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연구자에 따르면 남서부 사막지대에 사는 파파고 인디언은 생물을“생각하는 것”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 “나는 것” “가시가 있는 것” 등 놀랍도록 특이한 범주들로 분류한다고 한다. 식물계 안에 꽃을 피우는 다양한 식물들이 있고 그 안에 다시 장미와 해바라기 등이 들어가는 범주를 만들었던 린나이우스가 이들의 분류를 알았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어떤 종류의 세계관, 어떤 종류의 삶의 방식이어야 이렇게 이상한 범주들을 이해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걸까? 왜 모든 생각하는 것들, 혹은 모든 가시 있는 것들을 한 부류로 모아 놓은 것일까?  뉴기니의 카람족(수많은 뉴기니 사람들이 그렇듯 빼어난 자연탐구가들이다)에게는 우리가 동물이라고 부르는 범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데, 이는 ’동물‘이라는 범주 자체가 이들에게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동물이라는 범주 없이 어떻게 생명의 세계를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동물이라는 범주가 없다면 모든 생물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전형적인 영어 사용자들은 동물인가 식물인가로 제일 먼저 나누는데 말이다. 

그보다 더 이상한 예는 뉴기니 고지대에 사는 로파이포족이었는데, 아주 열성적인 사냥꾼인 이들은 카람족 못지않게 자신들이 사냥하는 동물들에 관해 잘 알았다. 그들은 작은 포유류로 구성된 한 분류군을 알아보고 이 동물들을 ‘후넴베’라고 부른다. 후넴베로 보기에는 너무 큰 포유류는 모두 그들 말로 더 큰 포유류를 뜻하는 ‘헤파’로 간주된다. 그런데 로파이포 사람들은 이 털이 있고 젖꼭지와 자궁이 있는 포유류들 사이에 화식조라고 알려진, 깃털을 비롯해 새의 특성은 다 가진 거대한 새를 집어넣었다. 자기들 주변의 동물들을 그렇게 잘 아는 이 사람들은 화식조가 새라는 걸 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왜 다른 부족들도 똑같이 그러는 걸까? 모든 새와 박쥐를 한 범주에 몰아넣은 카람족 역시 화식조만은 그 범주에서 빼놓았다. 그들이 자기네가 사냥하고, 먹고, 잡고, 그보다 훨씬 많이 관찰하여 상세하게 분류한 그 모든 생물을 아주 잘 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특히 더 이상한 일이었다. 뉴기니에서 수년간 연구한 인류학자 랠프 벌머가 쓴 유명한 논문의 제목도 이렇게 묻고 있다. “왜 화식조가 새가 아니라는 것일까?“

175:
랠프 벌머가 알아낸 바, 화식조가 새가 아닌 이유는 그것이 사람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었다. 그 지역의 신화에 따르면 화식조는 인류의 사촌이다. 벌머는 카람족이 화식조를 사냥하거나 죽였을 때 그 행위를 사냥이 아닌 살인으로 표현하는 의식을 거행한다는 걸 알게 됐다. 화식조를 사냥할 때 카람족은 화살이나 창 같은 날카로운 무기 말고, 가까운 친족과 싸워야만 할 때 그래야 하듯이 피를 내지 않는 둔기만을 사용한다. 살해 후에 살해자는 희생자의 심장을 먹는 제의를 올려야 하는데, 돼지를 죽이면 돼지가 죽자마자 가능하면 빨리 그 돼지의 심장을 먹는 식이다. 이와 유사하게 화식조를 죽은 사냥꾼은 글자 그대로 화식조의 심장을 먹어야만 한다. 화식조를 죽인 사람은 벌머의 표현을 빌리면 (살인을 저지른 사람처럼) ”제의적으로 위험한 상태“이기 때문에, 예컨대 토란을 기르는 밭처럼 성스럽게 여겨지는 장소에는 가면 안 된다. 

이 설명은 의문을 풀어주기 보다 카람족을 훨씬 더 남다른 사람들로 여겨지게 할 뿐이었다. 최소한 그들이 새와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은 나의 관점과는 거의 또는 전혀 무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77:
이번에도 수수께끼가 풀렸지만, 오히려 생명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나의 관점과는 더 거리가 멀다는 생각만 안겨줬다. 질병과 신체 부위는 열대의 난초를 생각할 때 우리 대부분이 떠올리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니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주변의 생명에 대한 상당히 기이한 개념들을 가지고 상당히 기이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인류의 모든 문화가 하늘에 있는 별들을 보고 각자 창의적으로 별자리들을 상상해 낸 것처럼, 모든 민족이 각자의 개별적 취향에 맞게 주변 생물들을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개념화하고 분류하고 이름 짓는 것 같았다. 그 최종 결과는 생물들과 이름들과 개념들의 혼란, 다른 분류 체계들과는 명확한 관련이 전혀 없는 분류 체계였다. 이로써 내가 뭔가 알아낸 게 있다면, 그건 사람들이 생명을 바라보는 각각의 시각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다르고 서로 더 많이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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