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오직 근심해야 할 것은

이춘아 2024. 2. 22. 21:39

강정일당, [정일당 유고](이영춘 옮김), 송키프레스, 2021.



14:
강정일당(1772~1832)은 수십 책에 이르는 학문적 저술을 하였으나 생전에 유실되어 전하지 않고 사후에 수습된 글을 모은 문집, [정일당 유고] 한 권만이 남아있다.

임윤지당(1721~1793)을 비롯하여 문집을 남긴 여성 대부분이 부유한 상류층인데 반해 강정일당은 극도로 궁핍한 환경에서 혼자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학문을 닦았다. 윤지당보다 50여 년 후에 태어난 정일당은 윤지당을 사숙하여 여성 성리학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정일당은 늦은 나이에 학문을 시작하였지만 성리학의 심오한 원리를 깨달았고, 정신 수양과 실천을 위해 평생을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불행을 학문의 힘으로 극복하고 안심입명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일당의 학문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성인의 경지를 목표로 한 강한 입지와 집념이다. 윤지당이 말한 것처럼 정일당 역시 본질적으로 남녀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고, 여성이라도 노력하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믿었다. 또한 진정한 도를 얻지 못하면 살아도 즐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정일당은 학문과 수행의 기본적 원리를 [중용]에서 찾았다. [중용]에서 말한 ‘계구(경계하고 두려워 함)’, ‘신독(혼자 있을 때 근신함)’의 수양을 쌓으면 마침내 ‘중화(덕성이 중용에 맞고 화평한 상태)’의 경지에 이를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심성의 수양을 위한 성실과 공경의 공부에 몰두하였는데, 이 두 가지를 도에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보았다.

19:
정일당은 결혼 전에 어느 정도 문자 교육을 받았지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게 된 것은 결혼 후였다. 남편이 학문을 시작하자 정일당도 곁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함께 공부하였다. 정일당은 비상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학업에 있어 항상 남편보다 앞서 나갔다. 그는 경전을 몇 번 들으면 곧 외울 수 있었고, 이해도 빨랐으므로 남편의 학업을 이끌었다.

21:
정일당은 남편이 학문과 수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였고,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문집에 수록된 쪽지 편지들은 주로 남편에게 학문을 권면하고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에 대하여 충고한 내용이다. 윤광연에게 있어서 정일당은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정일당과의 관계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나에게 한 가지라도 잘하는 곳이 있으면 기뻐하여 격려하였고, 나에게 한 가지 허물이라도 있으면 걱정하여 문책하였다. 나를 중도의 바른 자리에 서게 하며, 천지간에 과오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비록 내가 우둔하여 다 실천하지는 못하였지만 좋은 말과 바른 충고는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겼다. 이 때문에 부부지간에 마치 엄한 스승을 대하듯이 하였고, 조심하고 공경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매번 그대와 마주할 때는 신명을 대하는 것과 같았고, 그대와 이야기 할 때는 눈이 아찔하였다.“ ([돌아간 아내 유인 강씨에게 올리는 제문])”

22:
정일당은 몸이 허약하여 평생을 고생하였다. 1822년 7월(51세)에는 큰 병으로 사흘 동안 기절했다가 소생하였는데, 이때 평생 저술한 [답문편], [언행록] 등 수십 권을 모두 유실하였다. 정일당은 ”평생 정력을 바친 것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정일당은 만년에 병으로 신음하던 끝에 1832년 9월14일 타계하였다. 향년 61세였다.

남편 윤광연은 남아있는 시문을 잘 보존하였다가, 정일당의 사후 4년이 지난 1836년에 문집 [정일당 유고]를 간행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윤광연이 빈축을 사면서도 전 재산을 기울여 문집을 간행한 것은 강정일당에 대한 애도와 동시에 쇠락해 가는 가문의 지위를 다시 세우고자 했던 노력이라고 하겠다.

29:
정일당의 심성 수양 방법은 단정히 바르게 앉아 명상에 들어감으로써 성품이 발동하기 전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정신의 기운이 화평하여 혼연히 춥고 배고픔과 질병의 고통을 잊는다.“고 하였다. 그는 일찍이 ”종소리 한 번 듣고 이 마음을 끊지 못하였는데, 몸은 스스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다.“는 주자의 고사를 참작하여, 매번 아침저녁 종소리를 들으면 묵묵히 그것을 체험하곤 하였다. 그리고 서당 아이들에게 두레박을 고르게 치면서 놀게 하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이 잡히고 놓이는 경지를 실험하기도 하였다. 또 바느질을 하면서 일정한 구간을 정해 놓고 마음이 산란하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시키는 훈련을 하기도 하였다.

정일당의 실천 위주의 공부 방법은 자신의 생활 태도에서도 나타나는데 일상생활이나 가정관리의 모든 면에서 정밀하고 철저하였다. 특히 바느질 솜씨가 탁월하여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 일은 심성 훈련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타고난 품성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오랜 경전 공부와 수양에서 연마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30:
이러한 수양을 통하여 마침내 자신의 원초적 심성을 회복하고 마음을 자유자재로 조종하여 태연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처음에는 마음이 들떠 흔들렸으나, 점차 깊이 익숙하여 만년에 이르러서는 마음의 겉과 속이 태연하게 되었다.“고 그 경지를 표현하였다.

정일당은 심성 수양을 이기론과 연계시키지는 않았다. 이는 실천을 위주로 하는 학문적 성격에서 말미암은 것이지만, 19세기 초반 서울의 학문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일당이 살던 약현에는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고산자 김정호가 살았고, 김정호와 친밀했던 혜강 최한기는 윤광연과 교분이 있었다.

정일당은 평생의 정력을 기울여 성실 공경의 실천에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만년에는 성품의 본래 면모를 체득하였고, 곤궁한 생활 속에서 안분자족하며 안심입명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정일당의 시문 중에는 이러한 경지를 표현한 것이 많다.

밤이 깊으니 온갖 동물들 움직임 그치고
빈 뜰에는 달빛이 밝게 비추네
마음이 씻은 듯이 맑으니
성정의 진면목을 환하게 바라보네
(‘한밤중에 앉아서’)

또한 성현들이 전수한 도의 실체는 모든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것으로써, 마치 밝은 달이 물에 비치는 것과 같다고 묘사하기도 하였다.

옛 성현이 이 도를 전하시니
사람마다 함께 실천할 바이네
마음의 달이 찬물에 비치니
정기의 광채는 천추에 빛나네
(‘그믐달 밤에 우연히 짓다’)

또 정일당의 수행 경지는 임종 직전에 지은 시에서 잘 볼 수 있다.

여생이 삼 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성현이 되기로 한 기약을 저버려 부끄럽네
늘 증자를 사모하였으니
이제는 자리를 바꾸고 죽을 때가 되었네
(‘꿈속의 시’)

정일당은 이 시를 지은 지 사흘 후에 작고하였다.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은 모두 각자의 분수에 달렸으므로,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오직 근심해야 할 것은 스스로 자기의 도리를 다하였는가 하는 것이고, 그 밖에는 사람이 걱정하거나 탓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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