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가마타고 지리산을 오르다

이춘아 2024. 4. 25. 23:03

강정화, [산의 인문학, 지리산을 유람하다], 세창출판사, 2023.

(105~111쪽)
조선시대 지리산을 올랐던 대개의 선현은 요즘과 달리 평소 정기적인 운동을 하거나, 산행을 위해 체력을 비축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천왕봉에 오르고자 하는 강한 염원과 의지만으로 방안에서 글을 읽던 선비가 길을 나선 것이었다.

지금이야 유람자의 의지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산행할 수 있다. 지리산과 1천 리나 떨어진 곳에서 출발해도 이틀이나 사흘이면 지리산 종주를 거뜬히 마칠 수 있다. 서울의 직장인이 금요일 퇴근 후 출발하여 주말과 휴일 동안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월요일 아침에 정상 출근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만큼 산행이 일반화되었고, 안내자 등 산행에 필요한 주변 여건 등을 갖추기가 수월해졌다.

그러나 과거 선현의 산행은 어려움이 많았다. 변변한 지침서도 없었을뿐더러 유람을 이끌 안내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그 경비 또한 녹록지 않았다. 산행하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모두 준비해서 돌아올 때까지 가지고 다녔으니, 준비할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와중에도 산행에 초자인 유람자의 피로를 잊게 하는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옛사람 중에 두류산을 유람한 이는 많다. 그중에서 특히 점필재 탁영 남명 세 선생의 유람이 가장 두드러진다. 이는 그들의 풍치와 드높은 정신이 이 산과 더불어 그 우뚝함을 다투며, 이들은 유람한 뒤 유람록을 남기고, 그 유람록에서 풍광을 묘사한 것이 그 자태를 상세히 나타냈고, 감흥을 표현한 것이 그 정감에 적합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변변치 못한 내가 이 세 선생의 유람에 대해 그 뒤를 이어 유람하기를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한 번 유람해 보고 싶은 소원은 잠시도 마음속에서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조선시대 산행을 나서는 유람자가 출발에 앞서 필독하거나 지참했던 것이라면 앞 시대 선현의 유산기 정도였다. 특히 애독했던 작품으로는 김종직 김일손 조식의 유산기였다. 인용문은 경북 칠곡에 살았던 명암 이주대(1689~1755)가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산록]의 일부로, 그는 이들 세 작품이 현전하는 1백여 편의 지리산 유산기 중 진수라고 하였다.

물론 위 세 사람은 산행 코스가 각각 다르다. 김종직은 함양 중심의 지리산 북쪽 권역만 유람하였고, 김일손은 함양을 출발해 산청 단성을 거쳐 하동 청학동까지 아우르는, 곧 지리산 권역 북쪽 동쪽 남쪽을 모두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천왕봉을 올랐던 반면, 조식은 지리산 청학동 유람인지라 남쪽 권역인 하동 일대만 다녀왔다. 후대의 유람자들은 산행 전에 이들의 유산기를 미리 읽었고, 그들의 유산기에 나타난 유적지를 지날 때면 그 기록을 회상하며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예컨대 이주대는 청학동 불일암에서 빼어난 절경을 칭송하다가도 “붓끝으로 묘사해 낼 수 있는 건 두 선생의 유람록에 다 표현해 놓았으니, 나는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지 않겠다”라 하였고, 불일폭포 주위가 청학동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점필재와 탁영 두 선생은 그러하다는 견해와 그렇지 않다는 견해 사이를 견지하였고, 남명 선생은 이곳이 청학동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라고 한 후, 자신은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기록하였다.

함양군수 남주헌(1769~1821)은 1807년 3월 24일 청학동을 거쳐 천왕봉을 유람하였는데, “관찰사가 김종직 김일손 남효온 등의 지리산 유람록을 가져왔기에 때때로 빌려 읽어 유람 도중 사찰과 봉우리의 이름을 미리 알 수 있었다”라고 하였고, 하익범(1767~1815) 또한 천왕봉에서의 일출을 보고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의 산과 내와 고을 이름은 이미 탁영 선생의 유산기에 다 수록되어 있으니, 내가 무엇을 더 서술하겠는가?”라고 한 후 곧장 하산 길에 올랐다.

유몽인(1559~1623)은 일두 정여창(1450~1504)의 공간 악양정에서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 소개된 두 사람 간의 일화를 소개한 후 “말은 마음의 소리이다. 마음은 본래 텅 비고 밝으니, 말이 발하여 징험이 있게 된다. 그 뒤에 일두는 옥에 갇혔다가 죽었고, 탁영도 요절하였다. 그들의 천수는 모두 조물주의 입장에선 애석히 여길 만하니, 어찌 말의 예언에 징험이 있는 것이 아니랴”라고 하여 , 그들의 삶과 운명을 안타까워하였다.

이렇듯 후인들은 지리산 곳곳의 명승에 닿으면 선현의 기록을 떠올리며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나아가 자신의 유람을 선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하였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을 보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시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지금의 시대를 이해하려 했다. 선현들의 선택과 행위를 통해 지금 시대가 추구해야 할 목표와 행해야 할 행의를 생각하였다. 이러한 인문적 산수 유람은 산행에 지친 유람자의 정신적 피로를 풀어 주는 중요한 매개였다.

‘가마’도 빼놓을 수 없다. 유산기에서는 이를 남여, 또는 어깨에 메는 가마라 하여 견여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 산행에서 사용된 주요 운송 수단은 이 가마와 말이었다. 현전하는 산행 관련 옛 그림에 어김없이 그리고 가장 많이 등장하며, 장거리 유람일수록 더욱 필수 요소였다. 대개는 말을 탔고, 형편이 여의찮으면 기마를 탔다. 이마저 어려운 산비탈 등에서는 내려서 걷기도 하였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자면 산에서 가마를 타는 것이 의아스럽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인 듯싶겠지만, 조선조 유람자들은 산에서 걷는 것보다 말을 타거나 가마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마꾼은 출발 때 데려온 집안의 노비나 고용인도 있었지만, 대개는 산행로에 있는 사찰의 젊은 학승을 활용하였다.

하동 쌍계사나 신응사 등 지리산 권역의 큰 사찰에는, 많게는 수백 명의 젊은 승려가 정진하고 있었다. 1618년 4월 청학동을 찾아왔던 현곡 조위한(1567~1649)에 의하면, 신응사에 도착한 그들 일행을 승려 각성(1575~1660)이 마중했는데, 제자가 2백 명이었다고 한다. 호는 벽암이고, 각성은 법명이다. 그는 부휴 선수(1543~1615)에게 수학하여  조선의 불법을 7개 파로 나누어 크게 전파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군을 이끌었던 선승이 아니던가. 이들은 평상시 불법을 공부하며 정진하다가 유람 온 관료 등의 가마꾼이나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주로 젊은 승려는 가마꾼으로 , 노승은 안내자로 함께하였다.

1643년 8월 용유담을 거쳐 제석당 방면으로 천왕봉에 오른 구당 박장원(1612~1671)은 가마를 메는 승려가 70여명이라 하였다. 관찰사와 세 명의 수령이 함께 유람한 남주헌 일행은 배 두 척을 묶어서 만든 화려한 누선을 섬진강에 띄우고 쌍계사로 들어갔는데, ‘데려간 하인과 깃발 잡는 사람, 생황 켜는 사람, 퉁소 부는 사람, 그리고 각 고을의 요리사 등이 거의 3~4백 명이나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그중 가마꾼도 수십여 명은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