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여성주의의 대두

이춘아 2024. 5. 2. 12:23

류대영, [새로 쓴 미국 종교사], 푸른역사, 2024.

(496~502쪽)
1970년대 이후 미국 종교, 특히 기독교에 가장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은 여성주의로 대표되는 여성인권운동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주의 혹은 여성해방운동은 1960년부터 과거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는 과거 여성운동이 쟁취하기 위해서 애썼던 인권적 기본 권리들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미 법제화되어 있었다. 196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여성운동의 ‘두 번째 물결’은 사회적 경제적인 차원에서 완전한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대에 여성운동가들이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출산과 육아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 여성의 사회진출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교계는 이와 같은 전반적인 흐름에서 뒤쳐져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종교는 여성의 중요한 활동 영역이었고, 19세기의 초기 여성주의도 기독교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종교계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과 역할을 생각할 때 종교계에서 여성주의 운동이 크게 일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미국 종교계의 여성주의는 기독교 내에서 여성의 존재, 목소리, 기여를 찾는 움직임으로 1970년대부터 전개되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학과 전통의 모든 차원에 걸쳐 기존의 남성중심적 고정관념을 지적하고 그것을 깨기 위해서 다양한 문제를 제기했다. 신학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제기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신이 누구인가?‘였다. 여성신학자들은 신을 남성으로 표현해 온 오랜 전통이 여성을 압제해 왔던 가부장적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보스턴 칼리지의 메리 데일리(1928~2010)는 [하느님 아버지를 넘어서(1973)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죽음”을 말하며 가부장적 신 자체를 거부하여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원래 가톨릭신자였던 그녀는 기독교가 가부장적 요소들을 결코 극복하지 못하리라 보고 신앙을 버린 후 신학 대신 철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이 그렇게 급진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신과 인간을 표현할 때 특정한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중립적 표현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일은 많은 동조자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20세기 후반이 되었을 때 적어도 주류 교회에서는 신을 ’아버지‘로 부르고 인간을 남성으로 대표하는 행위는 금기시되었다. 성에 관한 중립적 용어들이 성서, 찬송가, 기도서, 그리고 각종 기독교 문서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진보적인 여성 신학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교회 속에 팽배해 있는 신의 남성적 이미지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의 여성적 이미지를 부각하는 작업을 했다. 1993년 11월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된 ‘다시 상상하기’에서는 소피아, 지혜 등 고대의 여성신을 재발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27개 나라, 16개 교단에서 2천2백 명이 참가한 이 모임은 그때까지의 여성주의 운동을 총결산한 역사적 집회였다. 같은 맥락에서 유대교 여성주의 신학자 가운데는 신의 내주indwelling을 뜻하는 ‘세키나’와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 전통에 등장하는 신의 배우자인 매트로닛을 여성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가부장적 역사 속에서 잊혔던 신의 여성성 혹은 여성신을 재발견하고, 가부장적 전통을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것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시도였다. 전통적 교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1993년 ‘다시 상상하기’ 대회에 관해 독일 침례교 계열의 한 보도는 “회의 전체가 이단에게 손뼉 치고 신성모독을 경축했다”고 평했다. 또한 장로교의 보수주의 간행물도 그 모임에서 “소피아, 창조주여, 당신의 젖과 꿀을 흐르게 하소서”라며 참가자들이 외쳤다고 전하며 “기독교에서 이교주의”로 빠르게 바뀌는 상황을 경고했다.

여성주의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던 분야 가운데 하나는 각 종교의 역사 속에서 여성이 감당했던 역할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여성은 모든 전통적 종교에서 교인 다수를 점해온 사실상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역사 속에서 언제나 남성 교권자의 권위 밑에서 그 존재가 망각되어왔다는 것이 여성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각 종교의 경전과 역사 속에서 여성의 존재와 그 신앙을 찾아내고, 특히 지도적 역할을 했던 여성을 발굴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1981년부터 5년에 걸쳐 발간된 [미국의 여성과 종교]는 이런 관심을 반영한 선구적 저술이었다. 총 세 권 가운데 이미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던 19세기 부분이 먼저 출간되었고, 이어서 식민지와 독립 국가 시기, 그리고 20세기를 다룬 책이 나왔다. 가톨릭 여성신학자 로즈메리 루터(1936~2022)와 개신교 학자인 로즈메리 켈러(1934~2008)가 편집하여 펴낸 이 사료사는 시대적으로 식민지 시기부터 1960년대까지 망라했고, 기독교의 각 교파, 원주민 종교, 아프리카계 종교, 시민종교, 유대교, 신흥종교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각 장은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개괄적 소논문과 중요한 일차 자료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사료사와 논문집을 겸한 형태였다. 편집자를 포함하여 20여 명의 모든 기고자가 여성학자라는 점에서 이 책은 미국종교사에서 차지했던 여성의 역할과 위상을 드러낸 한편, 여성학자들의 축적된 학문 역량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여성이 인격뿐 아니라 역할에서도 남성과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 여성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이런 포괄적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여성을 성직자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격돌했다. 여성 안수는 가부장적 역사를 반영하는 경전과 전통들이 금하는 일이었고, 현장에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사안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신학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였다. 김리교, 성공회, 장로교, 루터교 등 주류 개신교단들은 대체로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여성에게 성직 안수를 주기 시작했으며 주교-감독까지 탄생시켰다. 그러나 같은 장로교, 루터교 전통의 교회라도 보수적 신학을 가지고 있는 교단들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여성 성직자를 배출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장로교 주류 교단인 PCUSA나 루터교 주류 교단인 ELCA와 달리 보수적인 PCA나 루터교 미주리 교회는 계속 여성 안수를 금했다. 한편, 침례교는 19세기부터 여성목회자에 열려있었고 대부분의 침례교단이 그 전통을 이어갔다. 그러나 가장 큰 침례교단인 남침례교는 1980년에 근본주의자들이 교단을 “탈취”하면서 오랜 전통을 버리고 여성 안수를 금하기 시작했다.

대다수 교인들이 바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성직자를 허용하지 않는 대표적인 곳이 가톨릭교회다. 미국 가톨릭교회 여성들은 이미 1970년대에 교회의 모든 직분이 여성에게도 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76년 10월 바티칸 신앙교리성은 바오로 6세(1897~1978)의 추인 아래 여성 사제를 금하는 전통을 고수한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은 많은 미국 가톨릭교인, 특히 수녀들을 실망시켰으며, 수녀 수가 급감하게 되는 한 가지 요인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것은 20세기 후반기 들어 가톨릭 교역자의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한 전반적인 추세 가운데 일어난 현상이었다. 유대교에서는 1972년에 첫 여성 랍비를 탄생시킨 개혁파를 시작으로 차차 여성 랍비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보수파에서는 1983년에 첫 여성 랍비가 나왔다. 정통파 유대교는 계속 여성 성직자를 금했지만, 여성 안수를 금하고 있는 보수적 기독교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내부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교단에서 랍비 인정을 거부하자 정통파 소속 여성 가운데 개별적으로 교육을 받고 랍비가 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편, 유대-기독교 전통과 달리 불교는 원시불교 때부터 여성 사제인 비구니 전통이 있었다. 초기 경전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붓다가 각 분야의 으뜸가는 제자를 칭찬할 때 “신적인 눈”이나 “위대한 직관”을 가진 13명의 비구니를 일일이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전통이 북방불교에는 아직 남아있으나 남방불교에서는 사라졌다. 불교계에서 여성주의는 비구니 전통을 살려 여성의 역할을 증대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가부장적 아시아 문화와 분리시키는 노력으로 표현되었다.

신의 여성성을 말하고, 여성 종교인의 역사를 재발견하며,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여성 목사나 사제를 세우는 일은 결국 경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대표적 여성신학자인 엘리자베스 피오렌자의 [그녀를 기억하며](1983)는 가부장적 교회가 여성을 종속적 위치에 놓기 위한 의도로 기독교 성서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성서가 “사회적 교회적 가부장제”와 소위 ”하나님이 정한 여성의 위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여성해방의 적이 된 신약성서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작업은 처음에는 소수의 진보적 신학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여성주의가 역사적 대세가 되면서 보수 교회도 더 이상 여성주의 파고를 비껴갈 수 없었다. 1984년 일리노이 오크 브룩에서 개최된 ”여성과 성서에 관한 복음주의 콜로키엄“은 한편으로 성서의 권위를 헤치지 않고, 또 한편으로는 전향적으로 여성주의를 수용해야 하는 보수교회의 고민을 잘 보여주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유대-기독교 성서에서 전통적으로 가부장적 권위를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왔던 구절들을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여성주의적 요구를 수용했다. 그러나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J.I. 패커(1926~2020)가 콜로키엄을 평가하며 한 말처럼, ”남성-여성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가역적“이라 생각하며 ‘성서적 여성주의’에 불편함을 느끼는 복음주의자는 여전히 많았다.

여성주의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메리 데일리 같은 사람은 기독교 전통의 뿌리깊은 여성혐오에 절망하고 기독교를 버렸다. 그러나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자신의 종교 전통을 견지한 채, 종교를 믿고 신학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새롭게 질문했다. 그들은 성서, 교회, 의례같이 종교경험의 통로가 되던 전통들의 권위 및 정당성을 재점검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여성주의는 종교 속의 여성뿐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정체성 및 상호 관계, 가정과 사회 속의 여성, 그리고 가정과 사회의 본질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는 가운데, 1990년대부터는 여성주의의 ‘제3의 물결’이 일면서 여성 내부의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과제가 생겨났다. 즉, 기존의 여성주의는 소수 집단이나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여성에게는 발언권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을 지나치게 단일한 집단으로 파악하여, 다양한 개인적 경험이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데 대한 반성도 일었다. 이리하여, 여성주의가 제기한 다양하고 심오한 질문들은 각 종교가 21세기에도 계속 붙들고 씨름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