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이춘아 2024. 5. 18. 08:28

신동엽, [신동엽 시전집](강형철 김윤태 엮음),창비, 2023(2013 초판)

(100~104쪽)

금강

1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 소리 뿌리면서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거리며
노래 배워주던 그 양품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잘은 몰랐지만 그 무렵
그 노랜 침쟁이에게 잡혀가는
노래라 했다.

지금, 이름은 달라졌지만
정오가 되면 그 하늘 아래도 오포가 울리었다.

일 많이 한 사람 밥 많이 먹고
일하지 않은 사람 밥 먹지 마라.
오우우…… 하고.

질앗티
콩이삭 벼이삭 줍다보면 하늘을
비행기 편대가 날아가고
그때마다 엄마는 그늘진 얼굴로
내 손 꼭 쥐며
밭두덕길 재촉했지.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그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그땐
그 오포 부는 하늘 아래 더러 살고 있었단다.

앞마을 뒷동산 해만 뜨면
철없는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는 기억 속에
그래서 그분들은 이따금
이야기의 씨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리.

그 이야기의 씨들은
떡잎이 솟고 가지가 갈라져
어느 가을 무성하게 꽃피리라.

그 일을 그분들은 예감했던 걸까.
그래서 눈보라 치는 동짓달
콩강개 묻힌 아랫목에서
숨 막히는 삼복 순이엄마 목매었던
그 정자나무 근처에서 부채로 매미 소리
날리며 조심조심 이야기했던 걸까.

배꼽 내놓고
아랫배 긁는
그 코흘리개 꼬마들에게.

2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누르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놓았다.

1994년쯤엔,
돌에도 나뭇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하늘,
잠깐 빛났던 당신은 금세 가리워졌지만
꽃들은 해마다
강산을 채웠다.
태양과 추수와 연애와 노동.

동해,
원색의 모래밭
사리 굽던 천축 뒷길
방학이면 등산모 쓰고
절름거리며 찾아 나섰다.

없었다,
바깥세상엔, 접시도 살점도
바깥세상엔
없었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영원의 하늘,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신동엽(1930~1969): 193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하며 문단에 나왔다. 1963년 시집 [아사녀]를 출간했고, 1967년 총 4,800여 행의 대작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했다. 1969년 향년 40세에 간암으로 별세했다. 2013년 생가가 있는 부여에 신동엽문학관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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