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통신31 - Korean Americans
May 16, 2000
이춘아
가끔 들리곤 하는 스칼렛-베넷센터 도서관에서 우연히 [다문화 미국 백과사전](Gale Encyclopedia of Multicultural America, 2000)을 보았습니다. 황금과 꿈의 나라 미국으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미국인이 되었으나 그들의 앞에는 여전히 Irish American이라든지, Chinese American이라든지, Korean American으로 수식어가 붙게 됩니다. 지역적으로는 Asian American, African American 등으로.
지난번 미국통신29에서 한국교민이 경찰에 의해 죽음을 당한 글을 쓰면서 미국내 한국인들의 위상이랄지 그들은 어떻게 미국에서 뿌리내리고 있는지 막연하나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터라 [다문화미국 백과사전]이 금방 눈에 들어왔던가 봅니다. 이 사전은 미국내의 다양한 민족, 국가, 인종을 세분화하여 그들의 정치,사회,문화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각국에서 이민온 사람들로 또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가 드러나지 않게 투자를 하여야 할 부분이 이들 이민자들이 형성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할 것인가입니다.
최근 어떤 자료에서 각국 이민자들이 오면서 가져온 것 가운데 하나가 그들의 종교인데 그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미국의 주류 종교인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으며 미국의 종교형태가 바뀌고 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회문제, 정치적 이슈로 불거지기도 하는 인종간 갈등이 언제 어디서 시한폭탄으로 변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백과사전을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3권으로 이루어진 백과사전 가운데 2권에서 Korean Americans을 찾아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 봅니다. ( )속의 글은 제가 양념으로 끼워놓은 것입니다.
미국의 첫 한국인으로는 1885년 세 명이 정치적 망명으로 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며 1890에서 1905년 사이에 64명의 한국인이 기독교선교학교 입학을 위해 하와이에 왔고 이들은 학업을 마친 후 거의 모두 귀국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본격적인 이민형태를 갖춘 계기는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 모집이었습니다. 1902년 겨울 한국인 121명이 Gaelic호를 타고 하와이로 옵니다. 의료시설의 부족으로 배 안에서 19명이 사망하고 이듬해인 1903년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사람이 남자어른 56명, 여자어른21명, 어린이25명이었습니다. 이후 2년사이에 한국인이 7천명으로 급증합니다만 1905년 일본정부의 이주금지로 한국에 가족을 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국합니다.
1907년 미국과 일본사이에 신사협정이 맺어지면서 이 때 ‘사진 신부’가 등장합니다. 당시 한국인중 0.8%만이 여성으로 신부감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사진으로 선을 보고 신랑을 찾아 온 여성들이 ‘사진 신부’였습니다.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 1천명의 사진신부가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신랑들은 사진보다 훨씬 늙은 남자들이었고 따라서 이들 여성들은 이른 나이에 혼자가 되어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현지 적응을 위해 영어를 배울 시간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한일합방이후부터 해방되기까지의 기간에는 노동이주 보다는 정치적 망명자와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비밀결사대인 신민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1924년 통계에 따르면 541명의 정치망명객들이 있었다고 하며 이 중에는 안창호, 박영만, 리승만 등이 있습니다.
이차세계대전 이후의 이주자는 기술이민 정책에 따라 간호계통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과 전쟁고아 입양 등이 대부분을 차지했었는데 당시 남한에서 10만명의 어린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었는데 미네소타주에만도 1만명의 어린이들이 입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의 이민은 미국시민권을 획득한 친척의 초청으로 이주하는 경우와 전문기술자 우대 이민정책으로 수천명의 의사와 간호원이, 그리고 과학기술전문직종의 사람들이 이민오게 되면서 이들은 초기 이민자들과는 달리 미국내 한국인 중산층을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언어장벽으로 제대로 직업을 창출하지 못하고 심지어 의사가 간호보조나 병원잡역부로 일하는 경우도 있어 전문직종의 35% 정도만이 제대로 존경받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 ‘형제자매법령’이라는 비공식적 시행령이 제정됨에 따라 한국이민자가 급증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199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83만6천987명의 한국인이 미국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민 정책이 활기를 띄게 된 1991년에는 2만6천518명이 허가를 받아 그 한해의 비율이 1.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백여년의 한국인 이민역사를 조감하면서 이들의 미국정착 유형은 어떠하였는지 살펴보도록 합니다. 1900년대 초기의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탈피하여 도시로 이주하여 식당, 야채상, 목수, 재단사 등으로 일하게 되는가 하면 1907년 경에는 미국본토로 1천명의 한국인이 재이민을 하여 샌프란시스코, 유타, 콜로라도, 와이오밍, 아리조나, 알라스카로 이주하게 됩니다. 당시 대다수가 캘리포니아에 정착하기 하지만 와이오밍에는 광부로, 아리조나에는 철도노동자로, 알라스카에는 어부로 일자리를 찾아 갔다고 합니다.
1970년대 통계에서 한국인 이민자들의 거주비율이 높은 순으로 보면 캘리포니아-하와이-뉴욕-일리노이-펜실베니아-워싱톤 입니다만 1990년 센서스 자료에 따르면 캘리포니아(2만6천822명)-뉴욕(9만3천145명)-일리노이(4만2천167명)-뉴저지(3만8천87명)-텍사스(3만5천281명)-워싱톤(3만2천918명)-버지니아(3만2천362명)이며 메릴랜드, 하와이, 펜실베니아가 각각 2만5천여명 순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인구센서스를 10년 단위로 실시하고 있는데 올해 2000년 센서스 자료가 집계되면 한국인 이주자들의 분포가 새롭게 구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조지아의 아틀란타에 현재 5만여명의 한국인이 있다고 하는데, 아틀란타의 경우 세계올림픽이 개최되면서 급격하게 한국인 이주율이 높아진 곳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한국인 대부분은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에 거주하면서 한국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에 15만여명이 집중되어 있으며 뉴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중 경제적으로, 직업적으로 안정된 중산층이 되면 도시 근교로 집을 마련하여 나갑니다.
한국인들은 한인교회 또는 한인학교 등의 조직을 통해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확립해 가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가 이주정책상 새 이주자들의 공동체의식의 공유와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현지적응을 위한 문화적 완충역할도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1990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내 4백90여개의 한인학교가 주중 또는 주말에 운영되고 있으며 3천7백여명의 교사가 있다고 합니다. [U.S. Korea Review]라는 잡지의 1994년 4/5월호에 의하면 미국전역에 19개 여름한국문화캠프가 운영되어 학생들에게 한국문화를 전수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 한국에서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 영어교육에 주력하고 있듯이 미국내 한국인들도 마찬가지로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 한국어교육을 가르치는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한국계미국인으로서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까지 완벽한 구사할 수 있어야만 직업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이며 이는 경험적으로도 입증되어 한국인학교가 소리소문없이 잘되고 있다는 후문입니다.)
이민역사를 훝어보면 흑인에 대한 차별못지 않게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습니다. 1906년에 백인구역의 공립학교에 아시안들의 입학이 불허됐으며, 1913년에는 재산소유금지 조항까지 만들어졌으며 보이지 않는 직업시장에서의 차별, 저임금, 승진기회박탈 등으로 아시안들에 대한 편견이 많았습니다. 한국인들 역시 열외는 아니었습니만 억척같은 생존력으로 한국인에게 ‘수퍼 이민자’란 평을 받으며 사업과 교육에서 다른 이민자 집단을 제치고 성공하자 적대감과 분개의 대상이 되어 보이코트 당하기도 합니다.
한편 교육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 1980년 통계에 따르면 고등학교 졸업자가 미국전체평균이 66.5%인데 반해 한국이민자들은 78.1%이고, 4년제 대학 이상은 미국전체평균이 16.2%인데 반해 한국이민자들은 33.7%로 평균치보다 훨씬 웃돌고 있습니다. 전공별로는 수학과 과학분야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때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을 뒤집는 변화가 일어나 미국인들도 놀라게 한 사건은 한국인이민자들의 이혼율이 국가평균을 넘어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의 저변에는 부부가 함께 장시간의 노동을 하면서 집안 일까지 감수해야 하는 여성들의 고통스런 삶, 그리고 전통적인 가치관관 주류 미국문화 사이에서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됩니다.
한국인 이민자들 대다수는 자영업에서 출발하는데 그들은 한국에서 소규모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1977년 통계에는 이들중 33%가 야채농작물 소매업, 식품점, 서비스직, 주류가게 등을 소유한 소자본 경영자들이었으며 1980년 통계에는 시카고 드라이크리닝 가게의 95%가 한국이민자들이었으며 1990년도에 뉴욕에만도 1만5천500여개의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으나 불경기 등으로 경쟁력이 적은 소도시로 이주하여 사업을 벌여나갔습니다.
(이 백과사전의 Korean American 부분을 쓴 저자는 Amy Nash라고 쓰여있습니다. 이 저자 역시 코리안후손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외국인의 눈으로 기사를 썼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저자가 특색있게 코멘트한 것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미국내 한국인 공동체의 지지기반은 소규모사업의 성공에 기인하는데 여기에 ‘계’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것과 한국인들의 정치참여의 형태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계 미국인들이 미국내 투표참여율이 저조한데 반해 한국정치 참여에는 관심이 높아 이민역사 초기에는 독립운동에, 해방 이후에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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