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여행기: 광기
2019.9.5
이춘아
캄보디아는 내게 ‘킬링 필드’ ‘폴 포트 정권’이라는 단어 이외는 없었다. 물론 ‘앙코르와트’가 있긴하지만 매칭되지 않는 단어들이었다. 우리나라를 여전히 ‘한국전쟁’상황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캄보디아 여행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영상물을 찾았으나 예전에 보았던 킬링 필드 영화는 다시 찾을 수 없었고, 안젤리나 졸리가 감독한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2017)라는 영화를 보았다. 다섯살 여자 아이의 시선으로 킬링 필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프놈펜에서 킬링 필드 현장과 뚜엉슬랭박물관에 갔다. 프놈펜 인근에 있는 킬링필드 현장은 사람들을 매장한 곳이었고, 뚜엉슬랭 박물관은 학교였던 곳을 고문과 살해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1975~79년 사이에 이루어진 살해 현장이 캄보디아 전역에서 300여곳 갸량이며 약 2백만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내가 대학다녔던 시기와 일치하지만 당시 국내 사정에만 집중되었었는지 국제사정에 어두워서인지 캄보디아에서 이러한 학살이 벌어진 줄 (나만) 몰랐다.
1960~70년대 아시아에서 지식인들이 박해받고 수탈되었던 커다란 두 사건. 중화인민공화국 모택동 정권하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 폴 포트 정권 하에서의 지식인 살해. 이 두 건만으로도 오랫동안 이룩해 왔던 국가적 문화적 유산과 문명의 축적에 커다란 공백을 가져왔다. 현재의 캄보디아는 얼핏보아도 60대 이상의 노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시기에 살해되었던 청장년들이 사라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세대를 잇지 못하는 단절에는 엄청난 혼란과 개인적 국가적 재앙이 담겨있다. 잠재된 폭력의 흔적도 끊임없이 작동되었을 것이다. 실제 잔인한 살해사건이 간혹 일어난다고 한다.
폴 포트에 대해 읽어본다. 폴 포트라는 명칭은 이름이 아니라 영어의 폴리티컬 포텐셜 혹은 프랑스의 폴리티크 팡탕티엘의 줄임말로서 ’정치적 가능성‘을 뜻한다고 한다. 본명은 썰롯 써였던 폴 포트 그는 왜그랬을까? 특별나지도 특출하지도 않았던 그가 경험했던 어떤 극적인 지점이 모든 지식인들이 없어져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일까. 프랑스 유학 당시 알게된 사회주의적 소망만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 기간 중 독립운동가로서 민족해방운동에 동참하였고, 호치민이 지도하는 반프랑스 운동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후 공산당에 가담하였고 미국과 왕정에 대항하였으며 론 놀 정권을 타도하고 집권에 성공한다. 베트남 공산당으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베트남 전쟁에도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편들었다. 그러나 폴 포트의 가혹한 학살에 거부감을 느낀 베트남은 그와 결별하고 반체제 인사를 지원했다. 계속된 전쟁은 캄보디아의 경제를 황폐화시켰다. 집권기간 중 지주, 자본주의자, 반대파 2백만 명을 숙청하였고, 강제 이주책과 노동책, 흉년, 기근을 위시한 질병으로 국민 다수가 아사했다. 재임기간 원리주의적 공산주의에 따라 집단농업화 정책을 강제로 시행하여 많은 국민을 심문과 고문으로 죽게 했다.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정권을 잃고 북측 국경 밀림지대로 달아나 게릴라전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가택연금 상태에서 199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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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으로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문화대혁명(1966~1976)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마오쩌둥이 제창하게 된 동기는 노선을 변경한 소련의 수정주의가 중공에서도 재연되는 것을 방지하고 중국에서는 이상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천명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벗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미국과의 오랜 전쟁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베트남은 호치민이라는 위대한 지도자로 인해 오늘날 자립적인 국가로 설 수 있었던 반면 캄보디아는 폴 포트라는 잔학한 지도체제 하에 민족내부의 상처, 그리고 가난을 안고 살아왔다. 현재는 중국 자본에 의해 프놈펜과 캄퐁싸움(시아누크빌) 같은 도시는 난개발되고 있다.
개발도상국을 거쳐온 우리나라를 되돌아보면 지난 30~40년 동안 ‘개발’이 모든 것에 우선 순위였고 ‘발전’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사회경제적, 문화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했지만 환경과 인간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제와서 각종 폐해에 시달리고 있다. 외국자본에 의해 설계된 개발논리는 고층빌딩 높이만큼이나 대상국의 사람과 환경을 상대적으로 수탈하고 파괴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뚜엉슬랭 박물관은 2009년 유네스코가 ‘세계의 기억(the Memory of World)’ 장소로 지정했던 곳이고 내가 방문했던 시기는 10주년 기념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인류가 기억하면서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할 유산이라고 등재도 하곤 하지만 부정적인 유산은 왜 이리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5.18광주사태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긴 했지만 언젠가는 광주대학살로 세계의 기억유산에 등재될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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