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박 8일간의 실크로드 답사기⑥
죽은 이를 보내는 남은 자들의 소망
2003.11.27
이춘아
돈황 막고굴 249호
실크로드 답사를 가기 전부터 실크로드와 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돈황(敦煌)이었습니다. 그러한 기대 때문이었는지 답사다녀 온 이후에도 가장 마음에 남는 부분도 역시 돈황이었고 돈황의 막고굴은 답사 전과정의 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그 느낌의 실체를 무어라 결론짓지 못하지만 앞으로 생각해보고 찾아보아야할 많은 것들을 마음에 담아두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대전문화예술의전당 개관을 축하하며 대전시립예술단이 세계 문화예술의 변혁을 꿈꾸며 올린 공연의 제목이 신실크로드였습니다. 오케스트라+무용단+합창단이 함께 실크로드라는 주제를 예술로 형상화한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연을 보러갔습니다. 공연자체는 훌륭한 무대였으나 적어도 내가 찾고자하는 그 무엇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답사를 다녀온 후 나에게 남겨진 그 무엇의 정체는 ‘이거다’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이것은 아닌 것 같다’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답사이후 내가 가지고 있는 느낌으로 인해 오히려 공연감상에 방해로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평소의 공연관람이라 하면 사실 이전의 내 느낌이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공연에 몰입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공연관람은 이미 이전의 내 느낌이 강했기에 무의식중에 그 느낌을 찾으며 보기 때문에 일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봅니다.
명사산(鳴沙山)을 다녀오고 난 다음날 아침 돈황의 막고굴(莫高窟)로 향했습니다. 막고굴은 명사산 뒷편이라고 합니다. 어제 다녀온 명사산은 백설탕처럼 부드러운 모래라면 오늘 온 명사산 뒷편의 막고굴은 엄청나게 큰 굴에서부터 작은 굴에 이르기까지 발굴된 것만도 492개 굴이 만들어져있는 굳은 흙입니다. 석굴이라고 표현하나 아무래도 우리의 화강암 석굴형태가 아니기에 나는 자꾸 흙굴이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중국내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해당하는 돈황의 막고굴에는 유명세 때문인지 내국인 관광객도 많았습니다. 석굴 관람은 사진촬영이 엄금되어 있어 전체 관람객은 카메라, 비디오는 물론 손가방도 크기가 크면 들고 들어갈 수 없게 하였고 철저하게 안내인을 따라 입장하고 설명들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492개나 되는 석굴이 있었지만 우리가 당일 관람할 수 있는 굴은 십여군데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벽화의 탈색 등 손상을 막기 위해 매일매일 번갈아가며 관람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연변조선인의 가이드가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에서부터 4백년 전에 이르는 석굴의 벽화는 시대를 달리하고 있으나 벽화의 색과 문양에 감탄하였습니다. 간다라미술 양식에서부터 중국식으로 정착하기 까지 변모하고 있는 벽화를 손전등의 불빛만으로도 감탄하며 보았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벽화의 무늬를 보며 어디선가 아주 익숙하게 보았던 그 기억의 실체를 찾아냈습니다. 어려서 누워서 보았던 천장의 벽지무늬였습니다.
요즘은 민무늬의 벽지가 대부분이지만 이십여년전 만해도 우리 집 벽지 무늬는 천장과 벽의 벽지는 동일한 것으로 사용하여 간혹 잠 오지 않는 밤 누워서 별 헤아리듯 천장의 연속선상의 무늬를 헤아리곤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벽지의 문양은 돈황 석굴의 벽화를 모방한 것인 듯 합니다.
북한가정교회 모습 - 벽지와 바닥무늬는 벽화를 연상케한다
아는 분이 북한의 가정교회를 방문한 사진을 보여주는 순간 내가 찾던 그 벽지문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아직도 이 벽지문양을 사용하고 있고 방바닥 장판무늬도 내가 찾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반가움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문양과 다시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돈황의 벽화를 보면서 고구려 고분벽화가 시시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다 실크로드 답사 다녀오고난후 고구려 고분벽화 사진을 보니 돈황의 벽화를 만든 시기와 그리 차이나지 않은 상태에서 유사한 연꽃문양, 비천상 등이 정겹게 보이며, 이 역시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교류를 확인하게 합니다.
대전시립예술단이 올린 ‘신실크로드’ 공연의 주제도 돈황의 막고굴 237호라 명명된 석굴에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조우관(화랑의 깃 모양)을 쓴 사신이 있는 라는 벽화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듯이 저 역시 그 벽화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살펴보았습니다.
한 티벳왕의 무슨 행사에 외국사신들이 축하방문하여 행렬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제가 유심히 본 부분은 신라사신의 발이었습니다만 다른 사신들에 가려서 발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티벳왕에서부터 거의 모든 외국사신들이 맨발이었는데 반해 중국사신은 신발을 신었습니다. 당연히 신라인도 신발을 신었을 것입니다. 불교적인 공통의 축하행사에서 문화의 차이는 맨발문화와 신발문화로 크게 대별되는 것은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경주의 석굴암 등 많은 불교유적에서 맨발의 부처님, 보살상, 샌들신은 십이지신상 등의 모습이 의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점잖은(?) 사람이 맨발이라니... 맨발의 부처님은 인도, 티벳 쪽의 문화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중국, 한국, 일본만이 신발과 버선을 신는 문화권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전공한 울산대학교 전호태 교수님의 글에 이러한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왜 벽화를 제작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를 ‘죽은 이와 그를 보내는 남은 자들의 소망’이라 결론짓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들이 바로 우리의 내세관인데 그것이 시대마다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죽어서도 살아서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소망으로 생활풍속을 그대로 그리며, 연속적인 장식무늬를 반복함으로써 전생이 연결되길 바라는 소망으로, 또한 보다 종교적 심성이 축적되면서 선(禪), 불(佛)이 혼합되는 양식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돈황의 벽화는 죽은 이를 보내는 마음을 담는 내용보다는 불교적인 이야기를 교훈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야기 풀이는 무궁무진하며 동서 문화가 어떻게 교차되고 있으며, 시대를 달리하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벽화 속에서 헤엄치며 날아가다
돈황 막고굴 벽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이미지는 비천(飛天)이었습니다. 그것을 유영(遊泳)이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옆으로 헤엄치며 날아가는 모습입니다. 저뿐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에 남아있는 비천상은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비천상입니다.
에밀레종의 비천은 무릎 꿇고 손 맞잡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손 맞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병 또는 약병 같은 것을 들고 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래서 돈황 막고굴의 유영하는 듯한 비천상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비천상은 역시 점잖은 편이야 저렇게 요란스럽게 날아다니지는 않아,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 기회 되면 한국의 비천상들을 알아보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습니다. 절친하게 지내는 분으로부터 김천 직지사에서 가 있으니 꼭 다녀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신문에서 제목이 참 좋아 스크랩해 두었던 전시회였기도 하였기에, 전시회가 종료되는 시점인 10월의 마지막 날 함께 갈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4명이 직지사로 갔습니다.
예상외로 전시회의 규모는 컸습니다. 정성들인 탁본은 그 자체가 예술이었습니다. 범종에 그렇게 다양한 문양이 있는 줄 처음 알게 되었으며, 그것도 시대별로 구분하여 전시해놓음으로써 문양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두터운 한지에 묻어나온 문양은 스크랩북에 4B연필로 스케치한 것 같습니다. 마침 이른 시간이어서 관람객들은 우리뿐이어서 플래시 터뜨리지 않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실내에서 얼른얼른 찍은 것이라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만 몇 장면은 5만원짜리 [도록]보다 탁본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어 흐뭇합니다.
이 전시회의 제목이 입니다. 깨달음의 소리는 종소리일 것입니다. 종마다 음색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 소리도 한켠에서 들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놓았습니다. ‘하늘 꽃으로 내리는’이라는 표현이 아마도 비천의 전체 이미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스프레이 물로 적신 두터운 한지를 종에 잘 붙인 다음 최적의 상태로 말랐을 때 좋은 묵(좋은 묵이어야 함을 이 전시를 주관하신 흥선 스님은 강조하셨습니다)으로 문양을 두드려낸다고 합니다. 이 작업과정이 일반인과 다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 심미안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드러내는 것일 것입니다.
종교예술의 세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훌륭한 범종의 문양을 기본으로 하여 그 문양을 드러내는 작업에 담겨있는 마음이 있었기에 관람객인 우리까지 그 마음도 전달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뜻한 느낌의 한지의 질감에 결코 차지 않은 묵색으로 드러난 비천상은 이제까지 보아왔던 청동의 범종에서 볼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는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에 있는 벽화중 비천은 유영하는 모습인데 비해 통일신라 비천은 정적인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그리고 강원도 횡성에서 출토되었다는 14세기 종으로 추정되는 비천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마음 한가운데가 따스해지는 모습으로 이 탁본전의 압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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