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12일
격물치지(格物致知)
우리집 아이가 사용하던 초등학교 [사회과부도]를 가끔 봅니다. 운전용 지도책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용도가 서로 다르게 만든 탓도 있겠지만 운전용 지도책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아보기위한 목적형이라면 사회과부도는 가끔은 우리의 인생살이를 위에서 내려보게 하는 관조형이라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어느날 사회과부도에 표시된 우리나라 지도의 강줄기 이름을 보다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는 낙동강의 물을 먹고 자라나 성인이 되어서는 한강 물을 먹다가 이제 중년이 되어 금강의 물을 먹고 살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었습니다. <물은 물이되 그냥 물은 아니었다> 정도에서 맴돌고 있던 중, 한 친구로부터 ‘한강학’이라는 과목이 어느 대학에 개설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한강 구비구비에 얽혀있을 이야기를 교과목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참 그럴듯합니다. 역사학, 지리학은 물론 정치,경제학 전공자들이 그야말로 다학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주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 분야의 전공자들이 의기투합하여 일관성있게 접근해나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은 강의가 될 것 같습니다.
책을 소개하고 있는 [출판저널]을 훝어보고 있다가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갑자기 숨이 멈추어지는듯한 긴장감으로 읽기 시작합니다. 내가 찾던 바로 그것이 아닌가 할 때,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세기]라는 책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강판권이라는 역사학자가 쓴 책입니다. 읽었던 내용을 제 식으로 풀이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온 인생을 걸고 도전했던 박사학위를 갖게되었으나 그 학위로 일상의 밥벌이조차 하기 힘든 현실에 부닥치면서 이제까지 해왔던 공부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되었고 어느날 학교정원에 있는 나무를 헤아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헤아리기 시작했고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나무의 종류별로 다시 헤아리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단순한 숫자로서 나무의 수를 세는 단계를 넘어 저 깊은 의미까지 헤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서 계수나무, 박달나무, 측백나무를 비롯하여 열여섯 종류의 나무 몇 종류에 대한 헤아림을 글로 엮은 책이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세기]입니다.
미친놈처럼 나무를 세어가는 동안 그가 무심코 깨달은 것은 자신의 정체성 뿐 아니라 인문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부흥을 위한 새로운 공부법이라 생각한데까지 도달한 것인데, 바로 그 공부법은 이미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이루어놓은 공부법으로 일상의 주변에서부터 시작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였다는 것입니다.
서점에가서 이 책을 찾으니 공학코너에서 찾으라고 합니다. 서점원이 한동안 뒤지고 다녀 찾아주었습니다. 제목에서의 혼돈입니다. 나무가 주제어이기 때문에 자연과학으로 분류되었다가 웬 ‘인문학’이 나오니 어느 것이 우선인지 모릅니다. 식물,지리,역사가 포괄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어봅니다. 출판저널의 책소개에 이미 많은 부분을 읽었기에 더 큰 감흥은 없었습니다만 제 마음에 와닿는 부분은 이러한 것입니다. 나무를 세기 위해 나무를 보았고 나무를 만져보았고 그 이름을 알아보았고 그 이름에 버금가는 존재의 이유를 묻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사랑으로, 벅찬 감동으로 세상을 보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