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임시정부 주요인물이었던 현순목사 책도 읽고, 그의 [현순자서]라는 글 일부도 한글로 옮기게 되었다. 한자를 제대로 본지 오래되어 옮길수 있을까했는데 한자읽는 능력은 크게나빠지지않음을 확인. 한자쓰기는 확실히 능력저하.
회복하려면 오랜시간 공을들여야할듯 그럴 시간이 될까 (올해 꾸준히 쓰기해야한다고 마음먹다)
현순 목사 자소 중 16장 한글로 옮기다.
16장
(원문 38쪽)
16 3.1. 운동과 아의 사명
1919 기미년 1월중에 여는 의주 구읍 장로교회에서 부흥회, 사경회, 신성기도회 등을 (인도하고 ?사을 만히 밧고 1일은 교우 중 장씨 1인과 작반하야 통운정이 등하니 천리장강이 앞에 누어 잇고 임진왜란시 고적이 완연한지라 자연 시정이 감발하야 칠절1수를 음하엿다)인도하고
주일예배시에 교우와 주교학생 천여인이 교기 반기 등을 나열하고 시가에 나가셔 시위행렬을 시하엿으니 이것이 곳 독립운동 행렬의 효시라 할 수 잇섯다. 의주읍 집회를 맛치고 귀경하니 시는 2월초이오 태황제께셔 승하하신 후 십수일이 지냇더라 시내에는 국장습의가 성행하엿섯다 모일에 여가 종로청년회관과 기독신보사를 역방하고 주필 김필수목사와 작반하야 남문 외 제중원 약방주임, 이갑성 사저에 나가 본 즉 불기회로 회합한 인사들은 김필수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기선 박희도 현순 등이었다. 시일은 2월19일 오후2시경이오 토의의 대제는 독립운동이엿다. 해외로 종래한 소식을 종합하면 2월8일에 일본동경에셔 이광수 최팔용 등이 유학생을 휘동하야 독립을 선언하엿다하며 미주에셔는 이승만을 파리에 파송하야 평화회에 조선독립을 요구하엿다하고 중국상해에셔는 신한청년당에셔 김규식을 파리에 파유하엿다함이라 해외에셔 운동을 선행하엿으니 국내에셔는 거국일치적 운동을 필행하여야되겟다하고 달야토의하엿다.
(원문39쪽)
김필수는 토의중에 귀가하고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기선 박희도 현순 등 7인이 기독교회를 대표하야 간부를 조직하고 천도교회와 합동운동하기로 결의하엿다 익일 20일야에 이승훈 현순 양인이 정탐의 주목을 피하야가며 재동에 복거하는 최린을 방문하야 운동계획을 상의하엿다 최씨 왈 우리선생 손병희씨는 결심이 기견하니 우리는 단행할 뿐이라하엿다 이 현 양인이 귀래하야 간부에 보고하고 곳 단행키로 결정하엿다 태황제 국장일을 임박하야 거사키로 하고 부원 기인을 각처에 파유하야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인사들을 엇기로 하며 서무, 외교와 통신, 회계의 3부를 분하야 부무를 담임하니 서무에 이승훈 함태영 오기선, 외교통신에 현순 안세환 이갑성, 회계에 박희도이엿다
국내의 운동을 국외에 선전하야 외양동포들에게 알이며 열강에 선포하야 세계여론을 기케할 필요를 절감한 부원들은 외교통신원 1인을 상해로 파유하야 파리평화회에와 미포 교유 동포들에게 통고하며 외양형세를 시시로 살피여 국내로 통신케할 사명을 주자함을 의결하고 현순이 핵임에 당선하엿다. 22일 야에 이 현 양인이 최린 저에 다시 가셔 상기사항을 상의하니 최씨가 극희 찬성하고 천도교측으로 경비 2천원을 지발키로 하엿다. 최 현 양인간에 밀약은 하기와 갓흐니 최씨 왈 봉천에 해천양행이 있으니 차양행을 차저서 최운정(창식)이란 인사와 맛나셔 동행하라하며 상해로셔 잠입한 김철에게 운동금 1만원을 주엇으니 사세를 따라 쓰라하고 통신상 암호는 ?자로 정하다 익익23일에 이승훈이 천도교본부로셔 금2천원을 지래하야
(원문 40쪽)
차금중에셔 1천원은 기독교측간부에 임치하고 1천원은 현순에게 여비로 지급하다
24일 야에 가인에게만 고별하고 여는 용산역에셔 남만주 차를 타고 출발할새 부원중으로는 박희도 1인이 출역전송하며 자기의 금시계를 간부 신표로 여에게 주엇다 노친 유아들에게 알이지안고 극비중에셔 발정하는 여는 중대한 사명을 지고 원정에 임하매 뒷일은 아조 부원들에게 신탁하고 신앙과 희망만을 앞세우고 남만주로 향하엿다 25일 조조에 신의주역에 도착하야 그곳 장로교회목사 장정노를 방문하고 발정의 뜻을 대강 말하엿다 휴대금은 미상하는 동포에게 주어 안동역으로 선도케하고 여는 장목사와 동반하야 오후에 인력거로 도거하야 평산의원 신의사를 방문하엿다 신씨의 접대를 밧고 당야에 봉천행차를 타고 출발하야 26일 조조에 봉천역 도착하야 중국인 양차로 십간방에 잇는 해천양행을 차저갓다 양행주 이해천의 환대를 밧고 후방에셔 종일 잠복하야잇었다 일모토록 최운정이 도달치못함으로 당야에 봉천참에셔 봉진차를 타고 출발할 점에 최운정이 참두에 내하야 맛낫으나 최군은 명조에 출발키로 하고 여는 당야에 출발하야 익일 오후에 천진참에 도착하다 영인의 소영인 애스터호텔(Aster Hotel)에 투박하고 숙부에 한명은 하균 영명은 David Hah라하엿다 27일오후에 최운정이 래하야 당야에 천진에셔 출발하야 상해로 향하엿다 28일 포구에 도착하야 양자강을 도거하야 남경참에 하차하야 금능대학을 방문하고 재학중인 동포학생 수인을 만나섯다.
(원문41 쪽)
기억중에 남아잇는 학생은 김성근 현창운 서병호 등이다 소대사명을 대강 말하고 당일에 다시 출발하야 익일오후 7시경에 상해북참에 도착하니 차일이 곳 3월1일이엿다 상해의 기후는 음랭하고 춘우가 나리며 류엽이 초생하엿더라 재국 시에 미리 알아두엇든 장로교회선사 (Rev. George A. Fitch) 븨취씨를 차저갓다 씨의 안내로 최선두에 선우혁을 맛나고 삼마로 모 객잔에 투숙하엿다가 익일에는 남경로영안공사소영 대동여관에 이숙하엿다 3월2일야에 모 중채관에셔 신성(규식) 이광수 선우혁 김철 신헌민 등이 회집하야 현 최 양인을 접대하고 래의를 문하매 여가 국내독립당을 대표하야 상해에셔 외교선전통신 등을 진행할 뜻으로 래호함을 말하엿다.
최창식은 최남선의 저작인 독립선언서를 국산지에 세서하야 할지작절하야 회중에 품고온 것을 다시 해?부합하엿다 그리하고 국내에셔 전보오기만을 고대하였다 3월4일 조에 연합통신으로 영문대륙보(The China Press)에 3.1.운동의 대거가 등재되엇다 당일에 동?서주하야 재호인사들을 소집하야 협의한 후에 임시사무처를 법계하비로에 설치하고 현순은 총무가 되고 통신서기에 이광수 여운홍, 서무에 신성 신헌민, 재무에 김철 선우혁 등이 분담하엿다 최선착의 진행사는 국내에셔 맹기한 독립운동을 영문장전으로 파리평화회 법.미.영.이.백.중 6국대표에게 발송하고 재상항국민회 재호항국민회에 장전을 발송하엿다 조동호는 한문으로 현순 이광수는 영문으로 독립선언서를 번역하야 한영문신문에 발포하다 또 일방으로는 손문씨를 방문하고 선전 급 외교에 찬조를
( 원문42쪽 잘못 기재되어 43 쪽으로 넘어감)
엇고저 하엿으나 손씨가 기문인 호모를 파하야 면회를 사절하고 무삼 청구건이 잇거든 호군을 통하야 알게하라하니 이는 손씨 역시 일인을 기탄하야 한국혁명가들로 접대하기로 불긍함이러라 그리하야 신헌민의 소개로 손씨의 기관보인 The Shanghai Gazzette 솽하이께셋 주임 장경여를 면회하고 영국기자 1인을 국내에 파유하야 운동정형을 세밀히 탐색하야 오기로 결정하다 신헌민의 권고로 여는 숙소를 법계 김신부로 법인가에 정하다
3월8일경에 현순 최창식이 장경여를 대동하고 북경으로 출발하엿다 북경에 도착하야 북경반점에 투숙하야 화인 혁명가 수인을 맛나셔 동서의 국세와 한족의 독립운동을 의논하고 화우들의 권고로 여의 화명은 선강번으로 제명하엿다 장경여와 동반하야 영인기자 짜일 씨(William R. Gilies )를 방문하고 국내에 파유키로 결정하엿다. 재상해신한청년당에셔 김규식을 파유할 시에 김군에게 만흔 대조가 잇섯든 영인저술가 씸손씨(Lenoir B. Simpson)을 방문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정형을 말하엿더니 해씨가 국제기자단에 소개하야 중외기자 수십인을 회견하고 일본의 한국통치의 해독과 거국일치로 발생한 독립운동의 진의미를 해설하야 각국신문에 크게 선포되엿섯다
당시에 손정도는 북경에 선래하야 합달문내에 재한 감리교회 소영 병원에 유숙하고 하란사여사도 래유중에 우연히 유행성감위에 걸이어 고통타가 불행 병사하매 자경성으로 기부 하상기가 래하야 화인예배당에셔 장식을 행하고 북경성 외에 안장하엿다 기후에 여는 합달문내 병
( 원문44쪽 잘못되어 45쪽으로 넘어감)
원으로 전래하야 유숙하고 외교를 진행하엿는대 최운정도 동숙하고 손정도는 입정으로 여는 석정으로 작호하엿다 원장 Dr. N.S. Hopkins 홉킨 씨의 친절한 대우를 밧앗으며 북경기독청년회를 방문하고 미인총무 임격(R.R.Gaily)과 화인총무 장용지 등을 접합하엿다 임격씨와 동반하고 미국공사관에 전왕하야 일등비서관 텐니 씨(Charles A. Tenney)를 면회하고 우리 운동의 정세와 방약을 말하고 ?조를 청하니 텐니 씨 왈 표면으로는 할 수 없으나 이면으로는어데까지던지 협조하겟다하고 임격 씨에게 지휘하야 상해인사들에게 소개서를 하여 주엇으니 상해미총영사 커닝햄(Cunningham), 중국기독청년회전국총무 서일장 등이엿다 최창식은 국내로 다시가셔 운동을지휘하며 재정을 모집하야 오기로 하고 귀국하엿다 여는 손정도 장경여 등과 동반하야 상해로 회정하였다 북경에셔 맛난 인사들은 한진산 북경정부재직 중 한좌진 전강화군수로 ?직 출국하야 ??한 생활중 김애희 평양여자로셔 숭문문협화여의학교 재학중이엿다
3월25 6일경에 상해에 귀착하야 김신부로법인가에 귀숙하다 당야에 김철 군이 래고 왈 다수인사가 유북경??하야 최고 기관을 조직하랴하니 주의하라하엿다 익일야에 법계보창로 모처에 각방 인사들이 회집하니 자아령으로 이동녕 자만주로 이회영 이시영 자북경으로 이광 조성환 조용은이더라 재호인사들과 합석하야 최고기관조직안을 토의할새 조용은(소앙)이 격변을 토하야 차안을성립코저하엿으나 여는 국내에셔 무삼명령이 오기 전까지는 차안을 토의할 필요가 없음을 주장하엿다 임시회장은
(원문46쪽으로)
여가 당선하야 회의를 조종하고 국내운동을 응원하는 재외기관설치안이 통과되어 연구위원 8인을 선정하니 위원은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이광 조성환 신헌민 이광수 현순 등이엿다.
상기 위원 등이 수차회합하야 상의하엿으나 결과가 없엇다. 차제에 래호한 인사는 만주로 신채호, 경성으로 신익희 이봉수 고한 임득산 등인대 임득산은 평북철산인으로 순실용감한 의남아엿다 여의 통신을 수차 전달하엿으며 접제금도 가져다주고 임시정부조직후에는 1분의 모금이라도 정부로 납부하엿다 이봉수는 천도교측 청년으로 국내국외 출몰하며 정부조직에 노력하고 손병희로 대통령 박영효로 부통령 이승만으로 국무총리로 선거할 뜻을 비전하엿다 신익희는 기호인사들과 연합하야 암중비약을 시하엿으니 래호후로 신헌민 이시영 이동녕 신성 등과 교유하야 무삼 ?락을 결하고 1일은 여에 숙소에 래방하야 국내인사들의 속?을 전하며 국외 유수인물들을 망라하야 정부를 조직하라는 사명을 대래하엿다하며 불기일에 회집을 최하니 래참하엿다
4월초순경에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신헌민 신성 신익희 신채호 조성환 조용은 이광수 이광 현순 등이 남경로선시공사여관에 회합하야 임시정부조직안을 토의하엿다 논조가 귀일치 못하야 산회하엿다 제2차로는 법계보창로 모처로 이상 인사 이외에 다수청년들과 협동하야 위선 임시의정원을 조직하니 원장은 이동녕이 당선하고 임시정부는 통령제를 피하고 총리제로 채용하다 제3차로는 법계김신부로
(원문 47쪽으로 넘어감)
부근에 1대양옥을 세득하고 임시의정원을 개하엿다 현안인 임시정부를 조직할새 2종의 일사가 잇으니 1은 유위의 청년들이 권총목봉들을 가지고와셔 1방은 회중을 보호하며 우 1방은 회중을 위협하야 공정한 조직을 최한 것이오 2는 신채호가 총리로 추천된 인사 즉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 등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천하니 기시에 청년중으로셔 현창운이 골개적으로 신채호를 천하매 회중이 제군대소하여 신씨가 발노 이주하엿다 신씨가 이승만을 반대한 것은 그 이유가 박용만이 신성에게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미국정부에 청원하엿다고 전보한 소이이엿다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촉향이 오즉 이승만에게 폭주하엿섯다 그리하야 의회는 달야토의하고 결국에 임시정부를 조직하니 각원은 다음과 갇어라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최고위원 이동녕 이시영 현순 손정도 신채호 신헌민 신익희 이광수 이광 조성환 조동호 백남칠 김철 조소앙 최근우 한우근 현창운 등이 기억중에 남어잇다
4월12일 경에 임시 헌장10조와 임시정부조직선포문을 청년2인에게 주어 국내에 입하야 선포케하고 차장을 선임하야 정무를 집행케하니 내차 신익희 외차 현순 법차 이광수 재차 선우혁 군차 조성환 교차 김철 등이더라
( 원문 48쪽으로 넘어감)
여는 외차의 직임여무를 불구하고 실무에만 주력하야 귀호후에 화인중에는 서일장 당소의 미인중에는 미총사기독청년회총 피취( George A. Fitch jr.) 미해군출장소장교 곱 삐솝 틔낵(??Gap. Cope Luit Bishop Leut Martinak) 을 방문하고 교제를 시하엿다 법계거접에 안전책으로 법인율사를 매삭 수금 6백테일을 주고 고빙하야 법영사와 연락을 지어 적의 암행을 예통케하고 선전책으로는 상해께삿에 매삭3백원 지불하야 영문선전을 시하였는데 여의 한국독립운동의 전말이란 영문장논문을 등재하였다. 또 짜일씨에게셔 나온 적의 폭행사진들을 모집하야 발간선포하엿다
4월하경에 한남수 이규갑 홍진 장붕 등이 국내로 래호하야 한성국민대표회에셔 조직한 정부를 선포하니 총재에 이승만을 재한 소위 다?다단의 한성계통인 정부이엿다 재호인사들과 연석하야 수차협상하야 한성정부는 물시하고 상해계통인 임시정부를 그대로 추재하야 내외시정에만 노력하기로 하엿다
5월초에 안창호가 상항으로 향항에 도박하야 입호의 안전로를 조성환에게 전문하엿다. 시에 조씨는 북경으로 회정하며 안씨를 영래하라고 여에게 위탁하엿다. 그리하야 여가 향항에 도거하야 4일간 안씨를 심문타가 우연히 한 여관에셔 봉하니 동행인은 정인과 황진남이엿다 수일간민족사업에 대하야 토진간담하고 4인이 작반하야
(49쪽으로)
향항에셔 미선으로 출범하야 무사도호하엿다 호중에는 여의 부재중에 일대소란이 잇섯으니 적경이 법영사의 허가를 득하야 법계에 돌입하야 신헌민을 암?하야 경성으로 호송하고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이광 등은 다 북경으로 피거하엿더라 안창호와 여는 김창세 의사의 근무하는 홍십자병원에 투숙하다 기시에 여는 ??으로 계고타가 김성근의 소개로 영계?덕로에 재한 화인의사 호씨의 ??의원에 입하야 복약치료하엿다
6월중에 신도한 인사는 경남으로 윤현진 함북으로 이춘숙 해주로 김구 의주로 이유필 아령으로 원세훈 경성으로 남형우 등이요 7월중에는 최창식이 자경성으로 귀래하엿다 최군은 도호하야 즉시에 여의 숙소에 동거하다 안창호가 래호하야 각방인사들을 망라하야 정국을 수습하야하엿으나 여의치 못하고 단 기개인사들이 안씨를 추재하고 빈약중에셔 정국의 현상을 유지하엿으니 그 인사들은 양준명 이유필 김구 서병호 김홍서 이광수 등이오 외교는 정인과 황진남으로 신문선전계행할 뿐이엿다 선시에 재미 이승만은 상해계통인 임시정부의 총리의 직을 수하야 영포하고 또 차제에는 한성계통인 정부의 총재의 직도 수하야 영포하고 상해정부에 총리를 대통령으로 개제하여 달나하엿으며 안창호는 상항국민회에 지휘하야 애국금을 모집케하엿는데 이승만은 화부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공채금을 모집키로 결정하고 또 임시정부에 요구하엿으되 애국금을 변경하야 공채금으로 개정하야달나
(50쪽으로)
하엿다 안창호는 이러한 다단다?의 시국에 임하야 정서를 정돈하며 시정을 일층 새로게하기로 결심하고 총리를 대리하고 차장을 선발하야 총장을 대리케 할새 재호인사들중에 유위의 인물들에게 차저가셔 출각을 간청하엿다 종국에는 여의 숙소에 수차내방하야 최창식에게는 내각서기관장의 임을 탁하고 여에게는 내차의 임을 탁하엿다 여는 ?임을 고사불수타가 단 내각을 성형키만을 뜻하고 출마를 허하엿다 그리하야 6차장의 서임을 영포하엿으니 내차 현순 외차 여운형 법차 신익희 재차 윤현진 군차 이춘숙 교차 김철이오 내각서기관장은 최창식이엿다 정청은 법계하비로에 설치하고 부서를 배정하야 하층전면 우방에는 내부와 교통부를 두고 좌방은 재무부가 전용하고 후면우방은 접대실로 정하고 상층대방은 총리실이오 전방은 법무와 서기관장이 병용하며 후방은 외부와 군부가 병용하고 장랑일좌에는 김구의 지휘하에 잇는 경호원20명이 정복으로 근무하며 정청정문에는 인도인순경으로 수직케하엿다 매일출근은 오전9시로 오후4시까지하고 매조출근시에는 정부직원들이 집합실에 회집하야 무궁화1가 1절을 제창하고 총리의 고유가 잇은후 각부로 분진시무하니 일대수양소와 흡사하엿다 대리총리 안창호가 제1회각의를 소집하고 의안을 제출하니
1. 총리 이승만이 총리를 대통령으로 개제하여 달나함이오
2 총리 이승만이 애국금을 물시하고 공채금만을
(51쮹으로)
인준하야 달나함이오
3 상해정부를 한성정부로 개조하고 이동휘를 영래하자함이엿다
이상 3건을 토의한 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야 의결케하기로 하고 아령에 파인하야 이동휘를 영래키로 결정하엿는데 정부측으로는 현순 김용겸을 특파원으로 임명하야 아령인사 원세훈과 동반하야 발정케하엿다 선시에 현 최 양인은 ?덕로소재호의처에셔 장병로수인리 일소옥으로 이전하고 사가생활을 시하엿섯다
8월중순경에 현 김 원 3인이 상해에셔 영선으로 출범하야 영구에 도착하니 벌서 한정1인이 미행하엿다 객?에 투박하야 기주로 내정을 통하고 교책을 입하야 명조에 출발하겟다고 광포하고 야중에 인가로 잠출하야 대석교참에셔 발차하야 3인이 익조에 봉천에 안착하야 신?가화인여관에 투박하고 조반은 채관에 가셔 매식하고 귀숙하니 불교대표 신상완이 역시 동숙하엿다가 ?고 왈 군 등이 출관후에 왜헌병이 내관하야 군 등의 방을 사문하고 나갓으니 주의하라하엿다 또 3인은 출관하야 타관에셔 일야를 숙박하고 익일조에 봉천에셔 출발하야 빈강으로 직지하엿다 빈강은 북만에 가장 번영한 도회지인데 건축과 시가제도는 다 로서아식이더라 기시에 호열자가 대?하야 매일 3백여명 사망자가 잇섯음으로 오래 유연치 못하고 빈강에셔 출발하야 해삼위로 향하엿다 로중에셔 우연히 탓든 차를 떠나셔 전차로 이승하엿더니 ?
(52쪽으로)후차에셔 호열자가 발주하야 전차 승객들을 다 때여 내엿섯다 우리3인은 천행으로 환자의 차에셔 이승하야 차화를 면하엿다
8월30일경에 해삼위에 안착하야 신한촌을 방문하고 이동휘를 상봉하매 망국한에 늣기며 셔로 낙루하엿다 래의를 고하니 이씨가 ?연응락하엿다 숙사는 이강군 사저에 정하다 모야에는 아령인사들이 아인의 요리점에 회합하야 정부파원 현 김 양인을 초대하엿다 기시에 여는 상해에셔 조직된 정부는 지방의 원?과 시기의 급박으로 적법적이못 된 것을 늣기여 이제로는 국내에셔 조직된 한성정부를 봉재하기로 본정부제직은 결심하엿으니 이동휘씨는 종속 도호하야 총리의 직에 취임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엿다. 회합한 인사들은 다 가합하게들엇다 종차로는 도호의 안전로를 차젓다 위선 미군함에 가셔 해군참위 마틴낵씨를 방문하고 해삼위에 래한 뜻과 우리의 중요인물을 안전히 배종도호할 터인데 만주에는 적의 경비가 엄밀하야 통과키 난하고 해로로 가겟는데 미함에 용승하겟는가 향한즉 마씨 답왈 1개월후에 상해로 회정하니 기시에 역부들 변장승함하라하엿다 그리하고 마씨가 여를 대동하고 미육군사령부에 진왕하야 사령관(Col, Ichellberg) 아이철벅 정령에게 소개하엿다 해씨에게 일본과 포악한 정략과 아족의 용감한 자유전을 알여주고 겸하야 도호의 안전로를 문하니 아씨가 이태리군용선에 소개하야 승선하라고하엿으니 여의치못하고 아선에 자리를 엇어 4인이 일방에 합승키로 매표하니 곳 이동휘 김립 남공선 현순이엿다 재해항시에 미사령관에게 이동휘를 접견케하고 또 사령관
(53쪽으로)
의 위탁에 의하야 일군의 대아인폭행수십건을 조사 공급하엿다 상기 이 김 남 현 4인이 출항2일전에 아선에 등하엿는데 일군1소대가 여의 유숙하엿든 이강 저를 포위하고 여를 잡으랴 하엿으나 공행하엿다 4인은 극비중에 안전히 출항하야 연태를 경유하야 9월하순경에 상해에 안착하엿다 호중인사들은 열광적으로 이동휘를 환영하고 속히 국무총리에 취임키로 나섯다 그러나 이씨가 내심에 무엇을 포하엿더지 유연후수일에 소위 승인 개조란 언단을 시하야 취임키를 고사하엿다 열광중에 잇던 상해인심은 크게 격동되여 이씨를 강권하니 이씨 답왈 각원중 신규식 이동녕 이시영 등을 다 청래하야 합동취임케하라 하엿다 그리하야 정부에서 신익희를 항주에 파견하야 신규식을 청래하고 현순을 북경에 파견하야 이동녕 이시영을 청래하엿다 여가 북경에셔 먼저 회래한지 수일후에 법령사의 권고로 정청을 닷게 되엿다 10월 하순경에 북경으로 양이가 하래하엿다 그리하야 11월초에 총리 이동휘 내장 이동녕 법장 신규식 재장 이시영 노동총판 안창호 등이 일시동처에 회합하야 광대한 취임식을 거행하엿다 정청사무처는 각부를 분치하고 시정에 착수하엿다 차기간에 지난 일사는 내무부경무국장 김구가 적정 선우갑을 잡아 징치하엿으며 국내로 선교사가 가져온 금1만원을 여가 차젓는데 해주인 박희숙이 자기의 돈이라하야 주엇더니 김구가 또한 박을 잡아가두고 금액을 전부 압수하야 정부에 납부한 일이엇다 11월중에 안창호가 여의 숙소에 래하야 말하되 정국에 일대비난이 이나셔 해항에 파인한 책임은 내가지고 사직할 수밧게 업다하엿다 여일답왈 책자원수
(54쪽으로)
로 군이 사직할 것이나 군은 대국을 수습할 인망이라던지 수완이라던지 다 여에게 비견할배 아나니 군은 사직지말고 여가 사직하겟다하고 수일후에 여가 내부차장의 직을 사하엿다 거말기에 최운정이 또한 내각서기관장의 직을 사하엿다 동기에 장병로애인리집에셔 법계공원부근 군관로에 집을 엇고 이?하엿는데 이층전방에는 여와 최운정이 동숙하고 후방에는 이화숙 김원경 양여사가 동숙하엿섯다 경신년 1920 2월경에 임시정부의 특파로 북경에 올나가셔 미감교회동양선교총회에 참석하야 본국에셔 나온 총대들을 맛나섯다 총대는 최병헌 김종우 노블 케불 등이엿다 기시에 손정도 왓다가 선교사수십인을 청하야 접대하고 동양평화의 관건은 오즉 조선독립에 잇음을 역설하엿다 상해로 회래하야 다시 애인리집으로 이전하엿다 3월1일 제1회 3.1절기념식을 영계?덕로에 잇는 올임빅극장에셔 거행하엿는대 순서중에 여가 독립선서를 낭독한 것과 여운형이 상기식을 행한것은 잇지아니한다 4월초에 최운정 안현경과 동반하야 항주에 가셔 서호를 구경하고 전일 소동파의 향락하던 3담인월을 보고 7경1수를 ?하엿다
희간추수3담월 원보춘풍구곡교?고문장 안재재 월백풍청운불소
동월하순경에 의자 김성근가에 작탄이 폭발되여 후방벽이 파손되엿는데 이화숙은 머리빗고 김원경은 누어 독서하다가 파상벽돌에 맛지 아니하야 위험을 면하엿으나 집은 법경들에게 빼앗기고 축출을 당하여섯다 수일간 타처에셔 유연타가 다시 가구 등물을 차저가지고 애인리 다른집으로 옴겨들엇다
(55쪽으로)
기시에 이강호가 여의 가족을 대동하고 상해에 나왓섯다 1년동안 분리하엿든 가족을 반가히 만나고 다시 가족의 단?한 락를 보앗다 5월경에 이승만이 여를 주미경구미위원부원으로 임명하고 여비5백딸나를 보냇섯다 그리하야 정계파란이엇섯음도 불구하고 6월25일에 구주로 발정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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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나의 사명 (三一運動과 我의 使命)
* 이 글은,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가 1930년대에 자필로 쓴 “현순자사”(玄楯自史) 중 16장 “3・1운동과 나의 사명”(三一運動과 我의 使命)을 김흥수 교수가 한글로 옮겨 쓴 것이다. 현순은 3・1운동 계획 단계에 참여했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외무차장, 외무위원, 내무부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현순자사”와 이를 영어로 옮긴 영역본은 David Hyun과 Yong Mok Kim이 편집한 My autobiography by the reverend Soon Hyun 1878-1968: with historical documents, photographs and analysis(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Press, 2003)에 들어 있다. [ ] 안의 내용은 김흥수 교수가 첨가한 것이다. - 편집자 주
1919 기미년 1월 중에 나는 의주 구읍 장로교회에서 부흥회, 사경회, 신성(晨醒)기도회 등을 마치고 하루는 교우 중 장병(張丙) 1인과 동행하여 통군정(統軍亭)에 오르니 천리 장강이 앞에 누워 있고 임진왜란 시 고적(古蹟)이 완연한지라. 자연 시정(詩情)이 감발(感發)하여 칠언절구 한 수를 읊었다.(千里長江是大雄 望天一哭感吾主 統軍亭下卽行宮 融化世人眞聖風)
주일예배 시에 교우와 주일학교 학생 천여 인이 교기(校旗), 반기(斑旗) 등을 나열하고 시가(市街)에 나가서 시위행렬을 했으니 이것이 곧 독립운동 행렬의 효시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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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읍 집회를 마치고 귀경하니 시(時)는 2월 초요 태황제께셔 승하하신 후 십수일이 지났더라. 시내에는 국장(國葬) 예행연습(習儀)이 성행하였었다. 어느 날 내가 종로 청년회관[YMCA]과 기독신보사를 차례로 방문하고 주필 김필수 목사와 길동무하여 남대문 밖 제중원[세브란스병원] 약방 주임 이갑성 사저에 나가본즉 부정기 모임에 회합한 인사들은 김필수,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기선, 박희도, 현순 등이었다. 일시는 2월 19일 오후 2시 경이요 토의의 큰 주제는 독립운동이었다. 해외로부터 지금까지 들어온 소식을 종합하면 2월 8일에 일본 동경에서 이광수, 최팔용 등이 유학생을 움직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며, 미주에서는 이승만을 파리에 파송하여 평화회의에 조선독립을 요구하였다 하고,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하였다 함이라. 해외에서 운동을 앞서서 행하였으니 국내에서는 거국 일치적 운동을 필히 행해야겠다 하고 밤새워 토의하였다. 김필수는 토의 중에 귀가하고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기선, 박희도, 현순 등 7인이 기독교회를 대표하여 간부를 조직하고 천도교회와 합동 운동하기로 결의하였다.
다음 날 20일 밤에 이승훈, 현순 양인이 정탐의 주목을 피하여 가며 재동에 사는 최린을 방문하여 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최씨 말하기를 우리 선생 손병희씨는 결심을 했으니 우리는 단행할 뿐이라 하였다. 이승훈, 현순 양인이 돌아와 간부에 보고하고 곧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태황제 국장일(國葬日)을 임박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부원(部員) 몇 사람을 각처에 파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인사들을 얻기로 하며 서무, 외교와 통신, 회계의 3부를 나누어 부의 업무를 담임하니, 서무에 이승훈, 함태영, 오기선, 외교통신에 현순, 안세환, 이갑성, 회계에 박희도이었다. 국내의 운동을 국외에 선전하여 해외 동포들에게 알리며 열강에 선포하여 세계 여론을 일으킬 필요를 절감한 부원들은 외교통신원 1인을 상해로 파견하여 파리평화회의와 미국 하와이 교포들에게 통고하며 외양형세를 시시로 살피여 국내로 통신케 할 사명을 주자함을 의결하고 현순이 그 임무에 당선하였다.
22일 밤에 이·현 양인이 최린 집에 다시 가서 상기사항을 상의하니 최씨가 극히 찬성하고 천도교 측에서 경비 2천원을 치르기로 하였다. 최·현 양인 간에 밀약은 아래와 같으니 최씨 말하기를 봉천에 해천양행(海天洋行)이 있으니 그 양행을 찾아서 최운정(창식)이란 인사와 만나서 동행하라 하며, 상해에서 잠입한 김철에게 운동금 1만원을 주었으니 형편에 따라 쓰라 하고 통신상 암호는 림자(霖字)로 정하다. 다음 날 23일에 이승훈이 천도교 본부로부터 2천원을 가져와서 그 돈 중에서 1천원은 기독교측 간부에 맡기고 1천원은 현순에게 여비로 지급하다.
24일 밤에 아내에게만 고별하고 나는 용산역에서 남만주 차를 타고 출발할새 부원 중에서 박희도 1인이 역에 나와 전송하며 자기의 금시계를 간부 신표(信標)로 나에게 주었다. 노친(老親) 유아들에게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길을 떠나는 나는 중대한 사명을 지고 먼 여행에 임하매 뒷일은 부원들에게 신탁하고 신앙과 희망만을 앞세우고 남만주로 향하였다.
25일 이른 아침에 신의주역에 도착하여 그곳 장로교회 목사 장정로를 방문하고 길을 떠나는 뜻을 대강 말하였다. 휴대금은 쌀장사하는 동포에게 주어 안동역으로 미리 건네주고 나는 장 목사와 동반하여 오후에 인력거로 압록강을 건너서 평산의원 신 의사(醫師)를 방문하였다. 신씨의 접대를 받고 그날 밤 봉천행 기차를 타고 출발하여 26일 이른 아침 봉천역에 도착하여 중국인 자동차로 십간방에 있는 해천양행을 찾아갔다. 양행 주인 이해천의 관대를 받고 뒷방에서 종일 잠복하여 있었다. 날이 저물도록 최운정이 도달치 못함으로 그날 밤에 봉천역에서 봉진[봉천-천진]행 기차를 타고 출발할 점에 최운정이 역 앞으로 와서 만났으나 최군은 내일 아침에 출발키로 하고 나는 그날 밤에 출발하여 다음 날 오후에 천진역에 도착하다. 영국인이 경영하는 애스터호텔(Aster Hotel)에 투숙하고 숙박부에 한국 이름은 하균(河均), 영명은 데이비드 하(David Hah)라 하였다. 27일 오후에 최운정이 와서 그날 밤 천진에서 출발하여 상해로 향하였다.
28일 포구에 도착하여 양자강을 건너 남경역에 하차하여 금릉대학을 방문하고 재학 중인 동포 학생 수인을 만났다. 기억 중에 남아 있는 학생은 김성근, 현창운, 서병호 등이다. 내 임무를 대강 말하고 당일에 다시 출발하여 다음 날 오후 7시경에 상해역에 도착하니 이날이 곧 3월 1일이었다. 상해의 기후는 음랭하고 봄비가 내리며 버드나무 잎이 갓 생겨났더라. 출국 전에 미리 알아두었든 장로교회 선교사 피취(Rev. George A. Fitch)씨를 찾아갔다. 씨의 안내로 가장 먼저 선우혁을 만났고 삼마로(三馬路) 모 객잔(客棧)에 투숙하였다가 다음 날에는 남경 로영안공사(路永安公司)가 경영하는 대동여관(大東旅館)으로 옮겼다.
3월 2일 밤에 모 중채관(中菜館)에서 신정(규식), 이광수, 선우혁, 김철, 신헌민 등이 회집하여 현·최 양인을 접대하고 상해에 온 이유를 물어 내가 국내 독립당을 대표하여 상해에서 외교, 선전, 통신 등을 진행할 뜻으로 상해에 왔음을 말하였다. 최창식은 최남선의 저작인 독립선언서를 국산지(國産紙)에 잘게 써서 그것을 잘라 작게 꼬아서 품속에 품고 온 것을 다시 해승부합(海繩符合)하였다. 그리하고 국내에서 전보 오기만을 고대하였다.
3월 4일 아침에 연합통신으로부터의 소식이 영문대륙보 The China Press에 3・1운동의 대거(大擧)가 등재되었다. 당일에 동치서주(東馳西走)하여 상해 인사들을 소집하여 협의한 후에 임시사무처를 불란서조계 하비로(霞飛路)에 설치하고 현순은 총무가 되고 통신서기에 이광수, 여운홍, 서무에 신성, 신헌민, 재무에 김철, 선우혁 등이 분담하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국내에서 맹렬한 기세로 일어난 독립운동을 영문의 긴 전보로 파리평화회의 불란서·미국·영국·이태리·벨기에·중국 6국 대표에게 발송하고 샌프란시스코국민회, 호놀룰루국민회에 긴 전보를 발송하였다. 조동호는 한문으로, 현순, 이광수는 영문으로 독립선언서를 번역하여 한문, 영문 신문에 알렸다. 또 일방으로는 손문(孫文)씨를 방문하고 선전 및 외교에 찬조를 얻고자 하였으나, 손씨가 부하 호모(胡某)를 보내 면회를 사절하고 무슨 청구건이 있거든 호군을 통하여 알게 하라 하니, 이는 손씨 역시 일인을 두렵게 여겨 한국 혁명가들을 접대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헌민의 소개로 손씨의 기관보인 상해 가제트[The Shanghai Gazzette] 주임 장경여(張敬予)를 면회하고 영국 기자 1인을 국내에 파견하여 운동 정형(情形)을 세밀히 탐색하여 오기로 결정하다. 신헌민의 권고로 나는 숙소를 불란서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 법인가(法人家)에 정하다.
3월 8일경에 현순, 최창식이 장경여를 대동하고 북경으로 출발하였다. 북경에 도착하여 북경반점에 투숙하여 중국인 혁명가 몇 사람을 만나서 동서의 국세(局勢)와 한족의 독립운동을 담론하고 중국 친구들의 권고로 나의 중국 이름을 포강번(鮑康藩)으로 지었다. 장경여와 동반하여 영국인 기자 짜일(William R. Giles)씨를 방문하고 국내에 파견키로 결정하였다.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파견할 시에 김군에게 많은 도움이 됐던 영국인 저술가 씸손(Leonard B. Simpson)씨를 방문하고 한국의 독립운동 정형을 말하였더니 그가 국제 기자단에 소개하여 중국과 외국 기자 수십 인을 회견하고 일본의 한국 통치의 해독과 거국일치로 발생한 독립운동의 참 의미를 해설하여 각국 신문에 크게 선포되었다.
당시에 손정도는 북경에 먼저 와서 합달문(哈達門) 내에 있는 감리교회 경영 병원에 유숙하고 하란사 여사도 북경 체류 중에 우연히 유행성 감모(感冒)에 걸려 고통을 겪다가 불행 병사하매 경성으로부터 남편 하상기가 와서 중국인 예배당에셔 장례식을 행하고 북경성 밖에 안장하였다.
그 후에 나는 합달문 내 병원으로 옮겨와서 유숙하고 외교를 진행하였는데 최운정도 동숙하고 손정도는 입정(立丁)으로 나는 석정(石丁)으로 호를 지었다. 원장 홉킨(Dr. N. S. Hopkins)씨의 친절한 대우를 받았으며 북경기독교청년회[YMCA]를 방문하고 미국인 총무 임격(R. R. Gailey)과 중국인 총무 장패지(張佩之) 등을 만났다. 임격(林格)씨와 동반하고 미국공사관에 가서 일등 비서관 텐니(Charles A. Tenney)씨를 면회하고 우리 운동의 정세와 방략을 말하고 방조(幇助)를 청하니 텐니 씨 말하기를 표면으로는 할 수 없으나 이면으로는 어디까지든지 방조하겠다 하고 임격씨에게 지휘하여 상해 인사들에게 소개서를 하여 주었으니 상해 미총영사 커닝햄(Cunningham), 중국기독청년회 전국총무 여일장(余日章) 등이었다. 최창식은 국내로 다시 가서 운동을 지휘하며 재정을 모집하여 오기로 하고 귀국하였다. 나는 손정도, 장경여 등과 동반하여 상해로 회정(回程)하였다. 북경에서 만난 인사들은 한진산 북경정부 재직 중, 한좌진 전 강화군수로 기직(棄職) 출국하여 강개(慷慨)한 생활 중, 김애희 평양여자로서 숭문문협화의학교(崇文門協和女醫學校) 재학 중 들이었다.
3월 25, 26일경에 상해에 귀착하여 김신부로(金神父路) 법인가(法人家)에 귀숙하다. 그날 밤에 김철 군이 와서 알리기를 다수 인사가 북경에서 떠들썩하게 와서 최고기관을 조직하려 하니 주의하라 하였다. 그 이튿날 밤에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 모처에 각방(各方) 인사들이 회집하니 아령(俄領)으로부터 이동녕, 만주로부터 이회영, 이시영, 북경으로부터 이광, 조성환, 조용은이더라. 상해 인사들과 합석하여 최고기관 조직안을 토의할새 조용은이 열변을 토하여 이 안을 성립코저 하였으나 나는 국내에서 무슨 명령이 오기 전까지는 이 안을 토의할 필요가 없음을 주장하였다. 임시회장은 내가 당선하여 회의를 조종하고 국내운동을 응원하는 재외기관 설치안이 통과되어 연구위원 8인을 선정하니 위원은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이광, 조성환, 신헌민, 이광수, 현순 등이었다.
상기 위원 등이 수차 회합하여 상의하였으나 결과가 없었다. 차제에 상해에 온 인사는 만주로부터 신채호, 경성으로부터 신익희, 이봉수, 고한, 임득산 등인데 임득산은 평북 철산 사람으로 순박하며 용감한 의남아(義男兒)였다. 나의 통신을 수차 전달하였으며 접제금(接濟金)도 가져다주고 임시정부 조직 후에는 아주 적은 양의 모금이라도 정부로 납부하였다. 이봉수는 천도교측 청년으로 국내 국외 출몰하며 정부조직에 노력하고 손병희로 대통령, 박영효로 부통령, 이승만으로 국무총리로 선거할 뜻을 비전(秘傳)하였다. 신익희는 기호 인사들과 연합하여 암중 비약(飛躍)을 시(試)하였으니 상해에 온 후로 신헌민, 이시영, 이동녕, 신성 등과 교유하여 무슨 맥락(脈絡)을 결(結)하고, 하루는 나의 숙소에 내방하여 국내 인사들의 속망(屬望)을 전하며 국외 유수인물들을 망라하여 정부를 조직하라는 사명을 가지고 왔다 하며 불기일(不幾日)에 회집을 개최하니 와서 참가하라 하였다.
4월 초순경에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신헌민, 신정, 신익희, 신채호, 조성환, 조용은, 이광수, 이광, 현순 등이 남경로(南京路) 선시공사여관(先施公司旅館)에 회합하여 임시정부 조직안을 토의하였다. 논조가 귀일(歸一)치 못하여 산회하였다. 제2차로는 불란서조계 보창로 모처로 이상 인사 이외에 다수 청년들과 협동하여 우선 임시의정원을 조직하니 원장은 이동녕이 당선하고 임시정부는 통령제를 피하고 총리제로 채용하다. 제3차로는 불란서조계 김신부로 부근에 큰 양옥을 세를 얻어 임시의정원을 개하였다. 현안인 임시정부를 조직할새 2종의 숨겨진 흥미로운 일(逸事)이 있으니 하나는 유위(有爲)의 청년들이 권총 목봉(木棒)들을 가지고 와서 한쪽은 회중을 보호하며 또 한쪽은 회중을 위협하여 공정한 조직을 개최한 것이오. 다른 하나는 신채호가 총리로 추천된 인사 즉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 등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천하니 그때 청년 중에서 현창운이 웃기려고 신채호를 추천하매 회중이 큰 소리로 웃자(齊聲大笑) 신씨가 노하여 자리를 떴다. 신씨가 이승만을 반대한 것은, 그 이유가 박용만이 신성에게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미국정부에 청원하였다고 전보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촉향이 오직 이승만에게 폭주하였었다. 그리하여 의회는 밤새워 토의하고 결국에 임시정부를 조직하니 각원은 다음과 같더라.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최고위원 이동녕, 이시영, 현순, 손정도, 신채호, 신헌민, 신익희, 이광수, 이광, 조성환, 조동호, 백남칠, 김철, 조소앙, 최근우, 한우근, 현창운 등이 기억 중에 남아 있다.
4월 12일경에 임시헌장 10조와 임시정부 조직 선포문을 청년 2인에게 주어 국내에 입하야 선포케 하고 차장(次長)을 선임하여 정무를 집행케 하니 내차(內次) 신익희, 외차(外次) 현순, 법차(法次) 이광수, 재차(財次) 선우혁, 군차(軍次) 조성환, 외차(交次) 김철 등이더라.
나는 외차의 직임 유무를 불구하고 실무에만 주력하여 상해로 돌아온 후에 중국인 중에는 여일장(余日章), 당소의(唐紹儀), 미국인 중에는 미총영사(美總事), 기독청년회 총무(總) 피취(George A. Fitch Jr.), 미 해군출장소 장교 콥, 삐솝, 마티낵을 방문하고 교제를 시작하였다. 불란서 거주지에서 안전책으로 불란서인 변호사(律士)를 매달 보수금 6백 테일을 주고 고빙하여 불란서 영사와 연락을 지어 적의 암행을 예통(豫通)하게 하고 선전책으로는 상해 가제트에 매월 3백원을 지불하여 영문선전을 시작하였는데 나의 한국독립운동의 전말이란 긴 영문 논문을 등재하였다. 또 짜일씨(氏)에게서 나온 적의 폭행 사진들을 모집하여 발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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