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0일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 / 문태준
내 어릴 적 어느 날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랗게 익은 뭉뚝한 노각을 따서 밭에서 막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 안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泉水)를 떠내셨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곡식을 까부르듯이 키로 곡식을 까부르듯이 시를 외셨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밭에 자라 오르던 보리순 같은 노래였습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가 울렁출렁하며 마당을 지나 삽작을 나서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석류꽃이 피어 있었고 뻐꾸기가 울고 있었고 저녁때의 햇빛이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시를 절반쯤 외시곤 당신의 등 뒤에 낯선 누군가가 얄궂게 우뚝 서 있기라도 했을 때처럼 소스라치시며
남세스러워라, 남세스러워라
당신이 왼 시의 노래를 너른 치마에 주섬주섬 주워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몰래 들은 어머니와 누나와 석류꽃과 뻐꾸기와 햇빛과 내가 외할머니의 치마에 그만 함께 폭 싸였습니다.
고미숙, ‘낭독에서 낭송으로’,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2014, 북드라망
<낭독에서 낭송으로> 발췌
묵독에선 의미파악이 주가 되지만, 낭독에선 관객과의 소통이 핵심이다. 리듬과 절도가 있어야 하고 구어적이면서도 유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텍스트로부터 떠나야 한다.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그는 원고를 치워 버리고 모든 문장을 외워버렸다.” 이것이 낭송이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가? “연단에서 그 내용을 전하는 경우, 그 자체로 유연한 말이 되어 버려서, 본래의 거치적거리는 정확성이나 격식 같은 것은 영영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트웨인, [주석이 달린 허클베리 핀, 74쪽) 와우~! 소리가 텍스트를 바꿔 버린 것이다.
핵심은 외는 것이다. 다 외워야 낭송이 가능하다. 암기와 암송은 다르다. 암기가 음소거 상태에서 의미 단위로 텍스트를 먹어 치우는 것이라면, 암송은 소리로써 텍스트를 몸 안에 새기는 행위다. 앞에서 소리를 기억하는 건 뼈라고 했다. 그렇다. 뼈에 새기려면 외워야 한다. 다 왼 다음엔 텍스트를 버려도 된다. 즉,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되 궁극적으로 텍스트를 떠나는 것이다. 혹은 ‘떠나기 위해 텍스트를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떠날 수 있으면 다시 말해 텍스트 없이도 내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올 수 있으면, 이제 몸이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마크 트웨인처럼 무수한 변주가 가능하다. 연극적 재현도, 구성진 서사도 유쾌한 입담도 얼마든지 가미할 수 있다. 하여, 낭독은 낭송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낭송이란 존재의 탈영토화라 할 수도 있고, 존재가 또 하나의 텍스트로 탄생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류의 모든 경전은 다 낭송을 통해 전승되었다. 가톨릭의 기도문이나 불교의 반야심경, 유교의 사서삼경 등을 떠올려 보라.
...........
조선 시대의 선비들도 이런 식으로 독서를 했다. 소리 내어 읽고 또 읽다 보면 책이 없어도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면 몸이 곧 책이 된다. 다음은 다산 정약용의 간증(?)이다.
오로지 [주역] 한 책만을 책상 위에 두고 밤낮으로 마음을 가라앉혀 탐구했더니, 계해년(1803) 늦봄부터는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입으로 읊는 것,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붓으로 베껴 쓰는 것에서부터 밥상을 대하고 뒷간에 가고 손가락을 퉁기고 배를 문지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주역]이 아닌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치를 환히
깨달았다.(박희병 편역, [선인들의 공부법], 창비, 1998. 186쪽)
눈과 손, 입과 마음, 밥상과 뒷간, 손가락과 배까지 모두 [주역]과 혼융되어 버렸다. 텍스트와 존재의 간극없는 일치! 이것이 낭송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다. 기질이 바뀌고 삶이 달라지는 건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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