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1920년대 상해”(8)

이춘아 2020. 7. 5. 05:55

2020.7.5(일)
안재성,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2009.


동경으로 건너간 지 두 달 만인 1920년 11월, 박헌영은 상해로 가는 밀항선을 탔다. 공부를 위해서라면 일본에 머물러야겠지만 독립운동을 위해서라면 상해로 가는 게 옳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자리 잡고 있던 상해는 민족주의, 공산주의 할 것 없이 항일운동가들의 해외 집결소나 마찬가지였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일단 상해에서 항일조직에 가담하고 다시 국내에 돌아오는 게 보통이었다. 

중국 대륙의 입구이던 동양 최대의 항구도시 상해는 제국주의 침략의 관문으로 전락해 있었다. 황포강 부두에는 화려하고 웅장한 중세식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서양인들을 맞이했다. 시내 중심가도 여러 제국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공공 조계와 프랑스가 직할하는 프랑스 조계로 분할되어 중국인들은 옛 거리에 몰려 살아야 했다. 

자신의 땅에 들어갈 수도 없게 된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잃은 조선인들은 상해에 와서도 일본인으로 취급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와 체포대상이 되었다. 다만 프랑스 조계에서는 일본 경찰이 함부로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항일운동을 위해 상해를 찾은 조선인들은 주로 프랑스 조계에 몰려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와 요인들의 거주지도 프랑스 조계 안에 있어 임시정부 경무국장이던 김구는 14년 동안 프랑스 조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박헌영도 상해에 떨어지자 시커먼 중국옷으로 갈아입고 왕양옥이라는 중국식 가명을 지었다. 영어강습소에서 동갑내기인 임원근과 친해졌고, 박헌영은 그를 통해 여러 공산주의자와 교류하게 되었다. 특히 친해진 이는 김단야였다. 경북 김천의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3.1운동에 앞장섰다가 태형 90대를 맞은 적 있는 열혈청년이었다. 두 사람은 곧 절친해져 임원근까지 셋이 늘 함께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상해에 도착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허정숙 등 장차 조선의 공산주의 지도자가 될 젊은이들은 두 파벌 중 한 곳을 선택해야만 했다. 1921년 3월,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한 일단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고려공산청년단(고려공청) 상해회를 조직했다. 고려공청은 30세 이하 공산당원을 대상으로 한 청년조직으로, 최고책임자인 집행위원장은 최창식이 맡았다. 박헌영은 22살의 나이로 비서를 맡았고 두 달 후에는 정식으로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고려공청 상해회 비서직은 박헌영 생애 최초의 공식 직책이 되었다. 

1921년 8월, 이르쿠츠크 간도 상해 북경 동경 등 각 지역의 고려공청 대표들이 북경에 집결했다.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을 통해 고려공청을 조직하라는 국제공청의 지령에 따라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결성하기 위함이었다. 박헌영은 조훈 이괄 김호반 남공선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동시에 최고 책임자인 책임비서가 되었다. 고려공청 중앙총국의 책임비서이자 상해회의 운영을 맡은 박헌영은 바빴다. 이 바쁜 와중에도 상해 생활은 박헌영의 인생에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시기였다. 첫 아내가 되는 주세죽과의 만남도 그중 하나였다. 

함흥 출신으로 박헌영보다 두 살이 더 많아 1898년생인 주세죽은 고향에서 영생여학교 고등과에 다니던 중 3.1운동에 참가해 한 달간 수감된 전력이 있는 열혈 신여성이었다. 석방된 후에는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21년 4월 상해로 건너와 공동 조계에 있는 안정씨여학교에서 영어와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신세대 공산주의 지도자로 자리를 굳혀가던 청년 박헌영은 주세죽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박헌영은 다리가 짧은 대신 상체가 긴 편이어서 나란히 앉으면 박헌영이 더 커 보였으나 일어서면 주세죽이 더 컸다. 하지만 단단한 체격과 표범 같은 인상은 작은 키를  상회하고도 남았다. 두 사람은 곧 연인 사이가 되었다. 

생활은 궁핍했다. 코민테른에서 운영비가 나오기는 했지만 주로 인쇄비에 들어가고 있어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부분의 날들은 하루 두 끼니 밥을 먹을 형편도 못 되었다. 하루 종일 책과 자료 속에 파묻혔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중국 만두 한 개씩으로 허기를 달래곤 했다. 

이럴 때 큰 힘이 되어준 이는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우람한 체격에 화통한 목소리를 가진데다 성격도 호탕하고 개방적이어서 늘 주위 사람들을 압도하는 인물이었다. 여러 부류의 동포를 접해본 여운형은 앳된 얼굴을 한 22살의 청년 박헌영의 남다른 투지와 능력을 금방 간파해냈다. 어떤 조선인보다 공산주의 이론 수준이 높은데다 단정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주위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을 알아본 것이었다. 여운형은 일찌감치 박헌영을 고려공청뿐 아니라 장차 만들어질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감으로 점찍어 그가 경제적으로 여려울 때마다 최선을 다해 도와 주었다. 

박헌영 부부의 결혼식을 열어주고 주례를 서준 이도 여운형이었다. 여운형 자신도 이때는 넉넉한 여건이 아니었음에도 미리 교회를 빌리고 술과 음식을 장만했으며 두 사람의 혼수로 새 이불과 반지까지 마련해주었다. 여운형은 자신의 집 뒷방을 두 사람의 살림방으로 제공해주었다. 

1922년 3월, 국제공청은 박헌영의 제안에 따라,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조선 국내로 이전하도록 승인했다. 아울러 우선 국내의 혁명적인 학생조직에 세포로 조직하고 이들을 전국의 청년단체에 파견해 혁명화할 것, 만주의 의병운동과 관계를 맺을 것 등을 지령했다. 박헌영은 곧바로 이전 작업에 들어갔다. 1922년 3월 25일 ,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세 사람은 기선 북해환호를 타고 상해항을 출발했다.

조선과 중국을 잇는 압록강 다리는 삼엄한 검문검색이 이뤄지고 있었다. 항일운동가들의 왕래를 막기 위함이었는데 주된 적발 대상은 공산주의자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도보나 열차로 다리를 건너는 조선인 중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색이 보이는 자는 즉석에서 연행되어 호된 조사를 받았다.  신의주경찰서로 연행된 세 사람은 혹독한 고문에 처해졌지만 미리 말을 맞춘 대로 일관되게 진술했다. 박헌영은 상해에 공부를 하러 갔다가 김만겸, 안병찬 등의 강연을 듣고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조선에 들어가 공산주의를 선전하려고 귀국하던 길이라고 주장했다. 

공산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귀국하려 했다는 혐의 외의 범죄 사실을 적발해낼 수 없던 일제 법원은 세 사람을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해 평양형무소에 수감했다. 처음 감옥살이가 시작되었다. 감옥생활은 굶주림과 중노동, 고문과 질병으로 얼룩진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사상범들에게는 새로운 동지를 사귀고 책을 읽는 공간이기도 했다. 평양형무소에는 주로 북부조선의 항일운동가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과 맺은 각별한 우정은 나중에 경성콤그룹의 결성과 해방 후 조선공산당 결성에 기초가 된다. 

세 사람은 체포된 지 22개월 만인 1924년 1월 19일 평양형무소에서 동시 석방되었다. 한겨울 모진 추위에 형무소 문을 나선 세 사람은 주세죽과 허정숙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주세죽은 박헌영이 체포된 직후인 1922년 5월에 귀국해 옥바라지를 해오고 있었다. 다음 날 경성으로 들어온 소식은 [동아일보]에 '3씨 만기출옥'이라는 제목으로 짤막하게 보도되었다. 

“상해에서 공산주의를 선전했다는 일로 재작년 3월에 안동현에서 체포되어, 제령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1년 반의 언도를 받고, 그동안 평양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세 사람은 지난 19일에 만기 출옥하여 20일에 경성에 왔다더라.”

박헌영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언론에 보도된 기사였다. 

(1925년 11월 29일 주세죽과 함께 종로경찰서 체포
 1927년 11월22일 병보석으로 출감
 1928년 8월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 딸 비비안나 박 출산
 1929년 1월 18일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입학
  1932년 1월 25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참가를 위해 주세죽, 김단야와 함께 상해 도착
  1933년 7월 5일 상해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
  1934년 12월 27일 징역6년 형 선고, 아버지 사망, 상해에서 일본경찰로부터 도망쳤던 아내 주세죽은 김단야와 모스크바에서 재혼 
  1937년 11월 5일 모스크바에서 김단야는 일제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소련경찰에 체포, 판결 직후 사형
  1938년 5월22일 주세죽은 5년간 카자흐스탄 유배형, 이후 1943년 형기만료되나 유배지에 잔류, 1946년 6월 크질오르다로 거주지로 이전하여 봉제공장 직공으로 근무
  1953년 12월 박헌영의 재판 소식을 들은 주세죽은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폐렴으로 사망
  1956년 7월19일 박헌영은 김일성의 지시로 권총 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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