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댐 건축박물관ᆢ 수몰될 건물 중 예안의 성선현, 객사, 월영대, 석빙고 건물과 안동지방 민가인 까치구멍집, 도투마리집, 통나무집 등을 옮겨옮.
- 건진국수: 찬물에 받아낸 국수는 은어달인 국물에 말고 그 위에 애호박을 썰어서 기름에 볶은 꾸미를 얹은 다음 다시 실고추와 파 지단을 채로 썰어 고명으로 얹는다. 안동 국수는조밥 한 공기와 상추쌈이 함께 나와 매끈한 국숫발과 거친 조가 서로 맛을 돋우며 국수만 먹으면 배가 쉬 꺼져 허한 것을 보완해준다.
- 헛제삿밥: 제사도 지내지 않고 먹는 제삿밥. 나물이 큰 반찬인지라 콩나물 숙주 도라지 무나물 무침 등이 철 따라 서너가지씩 나온다. 산적으로는 쇠고기 상어 문어가 오르며 탕국으로는 무를 네모나게 썰어넣고 끓인 쇠고깃국, 간고등어
- 제비원 석불 ᆢ 안동시내에서 영주로 가는 5말이 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시오리쯤 가면 느릿한 고갯마루 너머 오른쪽 산기슭 암벽에 새겨진 커다란 마애불. 이 불상은 ‘안동 이천동 석불상’(보물 제115호)라는 공식명칭을 갖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제비원이라는 역원이 있던 자리여서 흔히 제비원 석불로 통한다. 불심 많은 착한 연이 아가씨의 화신이라는 설화에서 이 석불을 모신 절 이름이 연미사로 되었다는 얘기 등.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 무가 중 ‘성주풀이’라고 해서 성주님께 치성드리는 성주굿 노래에서 어느 지역이든 성주의 본향을 따지는 대목에서는 모두가 이 제비원 석불을 지목하고 있다. “성주님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제비원의 솔씨 받아....” 그래서 안동은 불교문화, 양반문화의 본향임과 동시에 민속문화의 본향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 안동에는 한자어를 둘러싼 많은 일화가 있다. 임재해의 [이바구세상](한울, 1994)
- 천등산 봉정사 ᆢ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13년 앞선 1363년에 중수한 사실만은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건축양식상 고식으로 판단되는 점이 많다. 봉정사 극락전은 흔히 고구려식 건축으로 통한다. 그것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기둥과 공포 그림이 나오는데 그것과 합치되는 결구방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옆으로 가로지른 창방 위에 올라앉은 나무받침이 역시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복화반을 하고 있고, 사용한 자가 고구려자였으며 무엇보다도 간결하면서도 강건한 인상을 주는 건물의 느낌이 그러하다는 것. 봉정사 극락전의 간결하면서도 강한 아름다움은 내부에서 더 잘 보여준다. “앞의 평주에서 고주로 대들보가 걸리는데 이 대들보를 다듬은 방식이 흔히 보는 살림집 것과는 다르다. 청자의 매병처럼 보의 어깨를 넓게 잡고 차츰 내려오면서 훌쳐서 홀쭉하게 하고 굽에 이르러서는 직선으로 다듬었다. 그래서 항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항아리보는 주심포계의 구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이며, 이것은 12세기의 보 형태로 여겨진다(신영훈 감수 [한국의 미 13: 사원건축], 계간미술 1983)
- 봉정사의 정연한 가람배치: 극락전 말고도 대웅전(보물 제55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 낱낱 건물 자체보다도 그 건물을 유기적으로 포치한 가람배치의 슬기로움에 있다. 봉정사 대웅전 앞마당은 전형적인 산지중정형으로 남북으로는 대웅전과 만세루, 동서로는 선방인 화엄강당과 승방인 무량해회가 포치하고 있다. 이 앞마당에는 석탑이나 석등 같은 일체의 장식물이 없고 반듯한 축대에 반듯한 돌계단이라는 정면성이 강조. 수평면에서도 대웅전을 슬쩍 올렸다는 기분이 들 뿐 평면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 단순성과 표정의 절제로 우리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말간 느낌의 절마당을 맛보게 된다.
- 봉정사 영산암: 낡고 낡은 누마루인 우화루 밑으로 대문이 나 있고 안에 들어서면 서너 채의 승방이 분방하게 배치. 안마당은 굴곡과 표정이 많아서 조금 전 우리가 보 ㄴ봉정사 대웅전이나 극락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 일부러 가산을 만들고 거기에 괴석과 굽은 소나무를 심고 여름꽃도 갖가지, 관상수도 갖가지다. 툇마루도 있고 누마루도 있고 넓은 정자마루도 있으며 뒤뜰로 이어지는 숨은 공간도 많다. 무너가 부산스럽고 분주하면서 그런 가운데 질서와 묘미를 찾으려고 한 흔적이 역연하다. 봉정사 대웅전 앞의 엄숙한 마당, 극락전 앞의 정겨운 마당, 영산암의 감정표현이 강하게 나타난 복잡한 마당. 마당을 눈여겨볼 줄 알 때 비로소 한옥을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건축의 에센스는 마당에 있다.
- 승효상, “단일 건물보다는 집합으로서의 건축적 조화가 우선이었던 까닭에 그 집합의 중심에 놓이는 비워진 공간인 마당은 우리 건축의 가장 기본적 요소이며 개념이 된다. 이 마당은, 서양인들이 집과 대립적 요소로 사용한 정원과도 다르며 관상의 대상으로 이용되는 일본의 정원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 안동의 삼태사 묘소: 장태사묘, 권태사묘, 김태사묘
- 안동의 옛 이름은 고창이었다. 930년 고창전투에서 왕건은 이 지방 토호인 권행, 김선평, 장길 등이 향군을 이끌고 도왔다. 왕건은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고 후삼국 통일 후 ‘동쪽을 안정시켰다’는 뜻으로 이 고장 이름을 안동이라 지었고, 3인의 호족에게 각각 태사 벼슬을 주어 그들이 곧 안동 권씨, 안동 장씨, 안동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 의성 김씨 학봉 종택: 학봉 김성일(1538~93), 학봉 종택에 많은 고문서를 일괄유물로 56종 261점을 보물 제905호로, 17종 242점을 보물 제906호로 지정하여 이것이 지금 운장각에 보관 진열되어 있다.
- 병호시비, 3차의 공방전: 병호시비는 류성룡의 병산서원과 김성일의 호계서원 간의 두분 사후 라이벌 대결. 시비의 발단은 1620년 퇴계를 모신 호계서원(당시 이름 여강서원)에 수제자 두 분을 함께 모시기로 결정을 보았는데 누구를 왼쪽에 모시느냐로 시비가 일어난 것. 병호시비의 2차전은 1805년 영남 유림에서 서울 문묘에 서애, 학봉 및 한강 정구,여헌 장현광 네분을 종사케 해달라는 청원을 올리기로 합의하고는 상소로 둘 다 기각. 3차 시비는 재상소하면서 학봉, 서애 순으로 되자 서애파들은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이후는병산서원에 따로 모이게 되니 안동의 유림은 학봉의 호계서원과 서애의 병산서원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 폐허로 남아 있는 경북선의 교각
- 풍산 들판: 하회를 향해 34번 국도로 가다보면 풍산읍 상리 어귀의 체화정 부터 또다시 반촌의 행렬. 풍산읍 우렁골의 선성 이씨, 오미동의 풍산 김씨, 소산의 안동 김씨, 하회의 풍산 류씨, 풍산 가곡의 안동 권씨 등등이 모두 풍산들판 언저리를 돌면서 동성마을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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