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1 월
내가 아는, 나를 아는 사물에 관하여
이사를 다니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사물’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오랫동안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던 ‘사물’ 중 하나는 정경화의 바이올린연주 레코드판이다.
고등학교 2학년때인지 1학년때인지 혼자서 처음 서울에 갔다. 중학교 친구가 서울로 이사갔다. 여름방학 때 친구가 서울에 올라오라고 하여 갔다. 지하철도 처음 탔다. 친구네 집은 종로3가 한복판에 있었다. 종로길을 지나가다 레코드점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나는 서울온 기념으로 라이센스판의 정경화 연주곡을 선택했다. 당시 내가 갖고 있는 클래식음반은 해적판으로 찍어 싸게 판매되고 있는 것 뿐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으로는 거금에 해당하는 라이센스판이었다. 흘러간 세월로 치면 그 음반이 내게 온지 50년이다. 음반을 싸고 있는 얇은 비니루는 여전히 건재하다. 고등학생의 눈에 비친 정경화의 모습은 큰 언니 모습. 지금 내 눈에 비친 정경화는 애띤 아가씨의 모습.
정경화의 차이콥스키 바이얼린 연주곡은 십대 소녀인 나에게 깊이 박혀 다른 연주자의 곡은 시시했다. 촌철살인 같은 짧은 평으로 유명한 박평식 영화평론가는 남편의 친구이다. 무명 시절 그는, 테이프에 음악을 선곡하여 편집한 후 "우리의 청춘을 갉아먹은 노래들”이란 제목을 적어 유학중인 남편에게 보내주었다 한다.
우리의 청춘을 갉아먹은 그리하여 우리의 몸에 인장을 찍어 둔 음악, 영화, 책들은 밥이 되어 나를 키워주었다. 생각해보니 먹는 것만 영양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듣고 보고 들은 것들도 영양가로 남아 내가 살아가는 전 시간을 관통하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 것들이다.
내 몸에 인장을 찍어 둔 사물 중 50년 넘도록 나와 함께 한 정경화 레코드 판. 턴테이블을 다시 사서 듣게 될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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