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진짜 영웅은 생활의 매일매일을 바꿔가는 사람입니다

이춘아 2023. 5. 6. 08:30

샹바오, [주변의 상실](김유익 등 옮김), 글항아리, 2022.

19: 예전에는 도구를 사용해서 분석하고 경제 운용 방법을 설계하고, 사회자원을 재분배하고, 도시계획을 하는 정도로 충분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전형적인 실증 연구와 정책 연구의 도구들입니다. 이런 전문가형 도구는 예전에 변화를 이끄는 경로가 됐습니다. 지금의 사회는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소셜미디어, 플랫폼 경제가 있고 청년들이 역대급으로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의 사고를 돕는 도구입니다. 이런 도구는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한 대의 컴퓨터, 스마트폰처럼 제가 상대방에게 건네줄 수 있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들의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아니면, 스스로 처리하고 발휘하는 능력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또 반드시 이 도구를 개조할 것입니다.혹은 필요 없어질 때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겠죠. 사회 연구자로서 저는 제 일이 이런 사고 도구의 부화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뭔가를 줄 수는 없지만, 그들을 일깨우고 자극을 줄 수는 있습니다. 전문가가 대중에게 이야기하는 모델이 바뀌어야 합니다. 

48: 중국 지식인들의 경험은 명확합니다. 20세기 1960~1970년대를 겪었기 때문에 모두 자유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인간성이 왜곡됐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다시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의 인생 경험과 기층 민중의 그것은 차이가 상당합니다. 그래서 꼬인 부분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관료의 부패와 인플레이션에 대해서 반감을 갖게 됐고, 사회주의 체제 자체에 대해서도 반감을 갖게 됐습니다. 서민들은 당연히 물가가 안정돼야 하고 부패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중국의 지식인들과 비교적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곳은 1970~1980년대의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입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일들은 큰 비극이고 서방 세계에 책임이 많습니다. 현재의 역사 서술은 유고슬라비아의 해체가 필연적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다른 민족이었으니까요. 소련이 이들을 억지로 묶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서 던져야 합니다. 유고슬라비아는 복수의 민족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지만, 당시 세계에서 가장 복지 수준이 높고 생활수준도 높은 국가 중 하나였고 문화예술도 뛰어났습니다. 바로 이런 국가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 아닌가요? 소위 문화, 민족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이것이 아름다운 이상적 실험 아니겠는가라고요. 

63: 청년은 아주 중요한데, 자기 청년 시절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지금의 청년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눈으로 우리를 판단해봐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진짜를 만날 수 있고, 스스로에 대해서 반성해볼 기회를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방화’ 같은 영화는 그다지 사회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청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과거를 이상화 낭만화하면 그게 일종의 순결한 것이 돼버리고, 반대로 지금의 우리는 뭔가 타락해버린 것 같죠. 순정하다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문제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83: 이게 아마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하는 중국과 일본의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문화 충격을 받아들일 때 ‘회심’(중국)과 ‘전향’(일본)의 문제입니다. ‘회심’은 옛 자아를 철저히 부수고 철저히 스스로를 반성해서 왜 남과 다를까를 반성해보는 겁니다. 그냥 단순히 차이가 어디 있는지 살펴보는 게 아니라 차이는 대체 무엇이고, 이 차이를 일종의 기정사실로 여기는 것이지 그걸 보충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동시에 사고와 창조의 출발점이 됩니다. 혁명적이죠. 다른 방법은 ‘전향’인데 그가 말한 일본의 방식이빈다. 

90: 여기서 원래 문제로 돌아가서, 우리는 공부를 통해 인류사회의 규율을 이해하게 되는데, 이게 자기 스스로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아니면 그냥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 되니까, 그저 남들을 기쁘게 하는 서비스 업무가 되어버립니다. 모두 반대로 생각해야 해요. 어떻게 남에게 기쁨을 줄까가 아니라 자기가 즐길 수 있어야죠. 사실 일반적인 서비스업도 잘 관찰해보면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호텔 같은 곳이 좋은 예입니다. 작가가 된 것처럼 다양한 사람을 관찰해보는 거죠. 프런트 데스크에 오는 사람은 저마다 다양합니다. 의사소통하는 방법도 다 다르고요. 담당자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준다고 생각해보세요. 로봇이 아니라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거죠. 그러면 꽤 많은 혁신이 일어날 겁니다. 

92: 반드시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1980년대에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 토론할 때는 마르크스주의를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은 이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그 후에개혁개방을 했죠.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실은 하나의 생명의 의미와 생활의 의미가 전이되는 과정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시험을 잘 보고 좋은 직장을 얻고, 집을 사고, 계속 의미가 외재적인 것으로 전이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전이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로 돌아와 합니다. 의미란 하늘에 붕 뜬 인문정신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건 경제와 관계가 깊습니다. 물질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사회관계는 어떻게 이 문제를 조정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 말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물질생산 노동의 기초 위에 이런 사고를 구축할 필요는 없습니다. 

93: 관건은 일종의 의식을 어떻게 형성하느냐는 것이고, 자기 역사의 기원과 자기 현재의 행동 사이에 균형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웅이죠. 진짜 영웅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생활의 매일매일을 바꿔나가는 사람입니다.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 근대성을 중심으로 사고하면 주변과 중심이 하나의 대립관계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중국인에게는 아주 강한 중심주의 정서가 있어서, 흔히 주변부에서의 생활은 가치 없다고 생각하며 극심한 초조함을 느낍니다. 권력과 자원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입니다. 학술기관에서도 하층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더 쉽게 ‘악당’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변부적 위상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탓에 주변에서 중심부로 진입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중심부에 일단 들어서면 원래 주변부에 있을 때 그나마 배웠던 사람다운 도리나 원칙도 저버리게 되지요. 

94: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은 중심부로 진입하려는 욕망이 아주 강합니다. 당연히 이런 욕망은 능동성을 극대화하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뒤틀린 욕망이 되기 쉽상이죠. 그리고 일단 중심부에 들어서면 많은 사람이 부패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 이유가 오로지 중심에 진입하기 위한 것일 뿐, 자기를 키워온 지역과 주변 사람과의 관계는 모두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그칩니다. 그렇게 원칙과 도리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갖게 되는 원칙은 추상적인 이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물론 유가의 사상이긴 합니다만, 나름 일리가 있습니다. 만일 주위 사람과의 관계나 생활 세계와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면, 기회주의자가 되기 십상입니다. 타인은 모두 이용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게 되죠. 학계에서는 그렇습니다. 관료사회에서는 더 명확하고요, 비즈니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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