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 디에센셜 헤르만 헤세](전영애, 정서웅 옮김), 민음사, 2022.
(9~12쪽)
네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이야기를 하려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이전 내 유년의 맨 처음까지, 또 아득한 나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들이 하느님이라고 되듯 그 누군가의 인생사를 훤히 내려다보고 파악하여, 하느님이 몸소 이야기하듯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이 어디서나 핵심을 집어내써 낼 수 있는 양 굴곤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작가들이 그래서는 안 되듯이. 그리고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떤 작가에게든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나 자신의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한 인간의 이야기, 즉 어떤 가공의 인물, 있을 수 있는 인물, 이상적인 인물, 어떻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일회적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 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 번 살 수 있을 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 버릴 수 있다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쓰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 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이 없는 하나의 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하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 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사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기는 한다. 그리고 느끼는 만큼 수월하게 죽어 간다. 나도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좀 더 수월하게 죽게 될 것이다.
나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 보며 찾지는 않는다. 나는 내 피가 몸 속에서 소리 내는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 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가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풀이를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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