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여자없는 남자들](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2014.
(22~25쪽)
다음날부터 미사키는 가후쿠의 전속 운전기사가 되었다. 그녀는 오후 세시 반 에비스에 있는 가후쿠의 맨션에 도착해 지하주차장에서 노란색 샤브를 끌고 나와 그를 긴자의 극장까지 태워다주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지붕은 내내 열어두었다. 가는 길에 가후쿠는 항상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조수석에서 거기에 맞춰 대사를 읊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겨 번안한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였다. 그는 바냐 아저씨 역을 맡았다. 대사는 전부 완벽하게 암기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날마다 따라 욀 필요가 있었다. 오랜 습관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곧잘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를 들었다. 그가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를 좋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싫증나지 않는 음악인데다 들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에, 혹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좀더 가벼운 음악을 듣고 싶을 때는 오래된 아메리칸 록을 들었다. 비치 보이스, 래스컬스, 크리던스, 템프테이션스. 가후쿠의 젊은 시절에 유행한 음악이다. 미사키는 가후쿠가 트는 음악에 대해 딱히 감상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지, 듣고 있기 괴롭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전혀 듣지 않는지, 가후쿠는 어느 쪽이라고 판단할 수 없었다. 감정의 움직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가씨였다.
다른 때는 옆에 누가 있으면 긴장해서 도저히 소리 내어 대사 연습을 할 생각도 못 하지만, 미사키의 경우에는 그 존재가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가후쿠는 그녀의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면이 감사했다. 그가 옆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대사를 읊어대도 그녀는 마치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어쩌면 정말로 아무것도 귀에 들어가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항상 운전에 신경을 집중했다. 혹은 운전이 가져다주는 특수한 선의 경지에 빠져 있었다.
미사키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가후쿠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조금쯤은 호의를 품고 있는지, 아무 흥미도 관심도 없는지, 혹은 신물이 날 만큼 역겨운 걸 그저 일자리가 필요해서 꾹 참고 있는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가후쿠는 딱히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는 이 아가씨의 매끈하고 확실한 운전솜씨가 마음에 들었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가후쿠는 곧바로 분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 입고서 빠르게 극장을 뒤로했다. 뭉그적거리고 앉아 있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배우들과의 개인적인 교제도 거의없다. 휴대전화로 미사키에게 연락해 대기실 입구에 차를 대라고 한다. 그가 나가면 노란색 샤브 컨버터블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열시반이 좀 넘어 에비스의 맨션에 도착한다. 그것이 거의 매일 되풀이 되었다.
다른 일이 생길 때도 있었다. 텔레비전 연속극 녹화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도쿄 시내의 방송국에 나가야 한다. 평범한 형사물이지만 시청률이 꽤 높고 개런티도 쏠쏠했다. 그는 주인공 여형사를 도와주는 점술가 역이었다.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그는 변장을 하고 몇 차례 직접 거리에 나가 진짜 점술가인 척 지나가는 사람들의 점을 쳐주었다. 제법 잘 맞힌다는 소문까지 났다. 저녁때는 녹화를 마치고 그길로 서둘러 긴자의 극장으로 향했다. 이 시간이 가장 아슬아슬했다. 주말에는 낮 공연을 끝내고 연기학원에서 야간반 수업을 했다. 가후쿠는 젊은 친구들을 가르치는 게 좋았다. 거기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것도 모두 미사키의 몫이었다. 그녀는 아무 문제 없이 예정대로 그를 여기저기로 태워다주었고, 가후쿠도 그녀가 운전하는 샤브의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것에 익숙해져갔다. 때로는 깊이 잠들 때도 있었다.
날이 따뜻해지자 미사키는 남성용 헤링본 재킷을 벗고 얇은 여름 재킷으로 갈아입었다. 운전할 때 그녀는 반드시 두 재킷 중 하나를 챙겨 입었다. 아마 기사 제복 대신인 모양이다. 장마철이 되자 차 지붕을 닫는 날이 많아졌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동안 가후쿠는 죽은 아내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미사키가 운전을 맡아준 이후로 왜 그런지 아내 생각이 자주 났다. 아내 역시 배우로 그보다 두 살 아래였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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