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백제 여행], 책읽는고양이, 2022(2판 2쇄).
(157~162쪽)
자, 관북리 유적은 이 정도 보고 다음 코스는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잡기로 하자. 참, 관북리 유적지에는 조선 시대 관청 건물도 위치하고 있다. 부여객사, 부여동헌 등이 그것으로 다름 아닌 백제 시대 주춧돌과 기단을 사용한 건물이 이들이다. 바로 그 뒤로는 현대 건축가인 김수근(1931~1986)이 디자인한 구 국립부여박물관 건물이 있다. 1967년 준공 후 70년부터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잠시 쓰였던 건물이기도 하다.
사실 부여의 박물관 역사도 만만치 않게 길다. 1929년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가 발족되어 백제의 유물을 모아 이곳 조선 시대 관청의 객사에서 전시하게 된 것이 시작이다. 그렇게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으로 운영되다가 1970년 김수근의 건물로 이주하여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의 모습에서 일본색이 너무 강하다는 비판 여론이 일어나고, 유물 조사를 통해 더 많이 소장하게 된 유물 숫자 때문에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면서 1993년, 정림사지 근처로 옮겨 가게 된다. 현재의 건물이 바로 93년에 이주된 그곳이다. 여기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겠다. 그럼 또 걸어가보자.
음료수를 마시면서 도시 구경하며 걷는데도 심심하니 역사 이야기나 더 해야겠다. 그럼 걷는 동안 성왕이 이곳 부여로 수도를 옮긴 후의 백제를 이야기해볼까나.
성왕(재위 523~554)은 무령왕의 아들이자 백제를 더 큰 강대국으로 만들려다가 안타깝게 전사한 비운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 헌신은 지금도 부여군에 남아 기억되고 있으니,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결코 실패한 인생이라 보지는 않는다. 국호를 ‘남부여’라고 성왕이 바꾼 것이 지금도 이어져 이곳 도시 이름을 부여라 부르는 것이니까.
성왕은 백제를 더 큰 나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외교전이었다. 이때에도 가장 큰 백제의 적은 고구려였고, 고구려는 무령왕 시절 백제가 한강 유역을 자신의 영토처럼 관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가 군대를 파병하면서 황해도 지역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성왕은 3만 명이라는 대군을 파병하였으나 큰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직접 왕이 전쟁에 참가할 정도로 이 전투를 중요시 여겼기에 벌어진 사건이기도 했다. 그 결과 다시금 한강 유역의 관리는 고구려 손에 들어갔다.
이에 성왕은 기본부터 다시 준비하였다. 신라와 외교 관계를 다시 수립하여 나제 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으며, 가야를 압박하여 백제의 줄에 서도록 만든다. 특히 가야와의 관계는 미묘했는데, 당시 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누구쪽으로 편을 들어야 할지 큰 고민 중이었다. 고구려라는 강한 적 때문에 백제와 신라는 동맹 중이었으나, 그럼에도 가야라는 지역을 둘 다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신라의 노골적 압박에 가야 일부가 신라로 점차 합병되고 있었다. 가야인은 이런 상황에 겁을 먹은 상황이었다. 이에 성왕은 신도시인 부여에 가야인들을 불러 541년, 544년 회의를 두 차례 연다.
당시 부여는 사비라고 불렸는데, 성왕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신도시였다. 앞서 아라가야는 길이 40m 너비 16m의 격 있는 회의 건물을 만들고 529년 안라 회의를 개최했는데, 그 건물은 면적은 넓으나 사실 초가지붕을 올린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백제 수도는 앞서 보듯 주춧돌과 기단을 이용하여 화려한 기와를 얹은 왕궁 건물들과 왕궁 못지 않은 규모의 사찰, 높은 목탑, 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부처 조각 등이 존재했으니 가야인들 눈에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곳에서 성왕은 가야를 적극 지원하여 신라로부터의 압박을 백제가 막아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가야 연맹국에게 중국 남조에서 받아온 보물들을 하사하며 백제 편으로 서도록 만든다. 결국 외교전에 성과가 있었는지 대부분의 가야세력은 신라가 아닌 백제의 편에 서게 되었다.
이후 성왕은 가야,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드디어 한강 유역을 다시금 수복하였으니, 이때가 551년이다. 백제가 외교로 묶은 다국적 군대 앞에 고구려는 맥없이 한강을 버리고 퇴각했고,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점령한다. 파죽지세의 승리이자 성왕의 외교적 노력의 꽃이 핀 것이다. 하지만 백제의 승리는 여기까지였다. 신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면서 백제는 빠르게 한강 유역의 영토를 포기하고 병력을 뒤로 빼게 되었다. 고구려에 대한 승리 직후 신라가 한강유역을 적극적으로 차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에 성왕은 자신의 딸을 신라 왕에게 보내 간신히 동맹을 유지하도록 하였으나, 결국 백제 내 태자를 비롯한 강력한 발언에 손을 들고 신라를 공격하도록 명한다.
백제는 뜻밖의 신라의 배신에 대한 분노로 동맹국인 가야와 일본 병력까지 동원하여 신라를 매섭게 공격하였다. 소백산맥에서 한강 유역으로 나올 수 있는 신라의 길을 점령하여 한강 진출을 다시는 할 수 없게 만들겠다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장을 책임지는 태자를 지원하기 위해 성왕이 태자가 있는 곳으로 직접 이동하다가 그만 매복한 신라군에게 공격당하면서 사로잡혀 목이 베이고 만다. 성왕은 이렇게 위대한 백제의 꿈을 마저 완성시키지 못하고 서거하고 말았다. 왕을 잃은 백제는 결국 나라를 건 중요한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고 신라의 부흥을 막지 못하게 되니…. 이 뒤로는 고구려가 아닌 신라가 원수가 되어 삼국 통일 마지막까지 대립하게 된다.
이처럼 위대한 백제를 건설했던 성왕이 마지막 단 한 순간의 승리를 놓치고 전사하면서 백제는 또 다시 위기에 빠지게 된다. 한강 유역은 그 뒤로 다시는 백제 영토가 되지 못했고, 오히려 백제는 가야 지역 지배권을 두고 신라와 수없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 어렵게 성사시킨 가야 동맹도 성왕의 죽음 이후 와해되어 신라 쪽으로 붙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왕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승화시킨 작품이 뜻하지 않게 1993년, 부여에서 출토되었으니 이제 막 국립부여박물관에 도착한 김에 그 작품을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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