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즈 파스칼, [팡세](김화영 옮김 해설), IVP, 2023(개정 증보판)
(367~369쪽)
기하학 정신의 경우, 원리들은 더없이 분명하지만 흔히 쓰이지 않다 보니 그쪽으로 머리를 쓰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쪽으로 쪼금만 생각을 돌린다면 많은 원리가 보인다. 원리들은 놓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명확해서 정신이 바르다면 그릇된 추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섬세한 정신의 경우, 원리들이 일상에서 사용되기에 모든 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다. 머리를 굳이 쓸 필요도 없고 애쓸 필요도 없다. 다만 좋은 눈을 갖는 것이 관건이다. 정말이지 좋은 눈을 갖는 것만은 필요하다. 원리들이 상당히 미묘하고 수가 많아서 놓치지 않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리를 하나라도 빠뜨리게 되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모든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매우 명확한 눈을 가져야 하고, 알려진 원리로 그릇된 추론을 하지 않으려면 올바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모든 기하학자가 좋은 눈을 지니게 된다면 섬세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원리로 그릇된 추론을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도 기하학의 익숙하지 않은 원리로 시선을 집중할 수만 있다면 기하학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가 기하학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기하학 원리로 관심을 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하학자가 섬세하게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하학의 분명하고 명확한 원리에 익숙한 데다 이 원리들을 살펴보고 적용한 다음에 추론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원리들이 그런 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 섬세한 분야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헤매기 쉽다. 이 원리들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본다기보다 오히려 느낀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이 원리들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이를 느끼게 하려면 힘이 든다. 이 원리들은 매우 복잡하고 수가 많아 이를 감지하고 그 느낌에 따라 바르고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예민하고 분명한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이 원리들은 기하학에서처럼 순서대로 증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식으로 파악되지도 않는다. 또 그런 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다가는 끝이 없게 된다.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점진적인 추론의 절차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한눈에 파악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기하학자가 섬세하다거나 섬세한 이들이 기하학적으로 다루고자 해서, 곧 정의를 내리고 원리로 시작하려고 해서 우습게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런 식으로 추론해서는 안 된다. 섬세한 정신이라고 해서 추론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섬세한 정신은 직관적으로 자연스럽게 기교 없이 추론한다. 이러한 추론 과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며, 이를 감지하는 것은 극소수 사람에게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한눈에 보고 단번에 판단하는 데 익숙한 만큼, 그들이 가늠하기 힘든 명제가 제시되면 매우 당황한다. 이 명제들은 매우 무미건조한 정의와 원리들을 통해 파악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렇게 상세히 보는 데 전혀 익숙해질 수 없어서 결국에는 반감을 갖거나 싫증을 느낀다.
그러나 부정확한 정신의 소유자는 결코 섬세할 수도, 기하학적일 수도 없다. 말 그대로 단지 기하학자인 사람들은 올바른 정신의 소유자이기는 하나 모든 것을 정의나 원리에 근거하여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판단은 잘못되고 견딜 수 없게 된다. 이들은 매우 명료한 원리에 기초하여 사고할 때만 올바르기 때문이다. 단지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사물의 제일원리까지 탐구하는 인내심을 지닐 수 없다. 그들은 그런 원리들을 이제껏 접해 보지도 않았고 사용해 본 적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하학/ 섬세함
참된 웅변은 웅변을 경멸하고, 참된 도덕은 도덕을 경멸한다. 다시 말해서 판단의 도덕은 실제 규칙이 부재한 지성의 도덕을 경멸한다.
사실 학문이 지성에 속하듯이 판단은 직관에 속하기 때문이다. 섬세함은 판단의 분야이고 기하학은 지성의 분야다. 철학을 경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철학하는 것이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물도 수학을 할까 (1) | 2023.07.27 |
---|---|
백제 성왕 (3) | 2023.07.20 |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대답들이 있었다 (5) | 2023.07.14 |
감자바위 영성 (2) | 2023.07.07 |
내 안에 무엇이 살아있는가 (4) | 2023.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