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452

소나기

황순원 단편선, [독 짓는 늙은이], 문학과지성사, 2018(1쇄 2004) (14~16쪽) 소년이 고삐를 바투 잡아 쥐고 등을 긁어주는 척 후딱 올라탔다. 송아지가 껑충거리며 돌아간다. 소녀의 흰 얼굴이, 분홍 스웨터가, 남색 스커트가, 안고 있는 꽃과 함께 범벅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큰 꽃묶음 같다. 어지럽다. 그러나 내리지 않으리라. 자랑스러웠다. 이것만은 소녀가 흉내내지 못할 자기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너희 예서 뭣들 하느냐.” 농부 하나가 억새풀 사이로 올라왔다. 송아지 등에서 뛰어내렸다. 어린 송아지를 타서 허리가 상하면 어쩌느냐고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다. 그런데 나룻이 긴 농부는 소녀 편을 한 번 훑어보고는 그저 송아지 고삐를 풀어내면서, “어서들 집으로 가거라. 소나기가..

가난을 훔치다

박완서, [나목, 도둑맞은 가난], 민음사, 2011(1판 1981)). 도둑맞은 가난 (440~443쪽) “여봐, 이러지 말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소리를 정신 차리고 똑똑히 들어.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도둑놈은 더구나 아냐. 나는 부잣집 도련님이고 보시는 바와 같이 대학생이야. 아버지가 좀 별난 분이실 뿐이야. 아들자식이 너무 고생을 모르고 자라는 걸 걱정하셔서 방학 동안에 어디 가서 고생 좀 실컷 하고, 돈 귀한 줄도 좀 알고 오라고 무일푼으로 나를 내쫓으셨던 거야. 알아듣겠어?“ 어떻게 그걸 알아들을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 어머니는 부자들이 얼마나 호강들을 하며 사나에 대해 아는 척하기를 좋아했었다. 세상에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고, 인생의 온갖 열락이 돈 주위에 아양을 떨며..

평범한 것들의 가슴 아픈 소박함

존 케닉, [슬픔에 이름 붙이기], 윌북, 2024. (44~46쪽) 살아 있는 것들 대부분은 삶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그저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다. 늙은 고양이는 서점 창가에 앉아서 사람들이 헤매는 동안 즐겁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차분하게 눈을 깜빡이며,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길 건너편에 밴에서 짐을 내리는 모습을 게으르게 쳐다보며,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그리고 그래도 괜찮다. 그렇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쁜 건 아니다. 삶의 거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평범한 시간 속에서 흘러간다. 대단한 투쟁도, 신비하고 성스러운 일도, 직관의 순간도 없다. 그저 작은 이미지들에 붙들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소박한 가정생활이 있을 뿐이다. ..

'스스로 길이 된 사람'

김기석, [걷기 위한 길, 걸어야 할 길], 비아토르, 2020. (14~ 19쪽) 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고집쟁이 영감의 책을 읽었습니다. [나는 걷는다]라는 책 제목이 워낙 도발적이어서 손에 잡았는데, 책이 그려 내는 삶의 이야기가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에 이르는 1만 2천 킬로미터의 실크로드를 걸었습니다. 그것도 60세를 넘긴 나이에 말입니다. 무모한 여정이었습니다. 그가 직면했던 어려움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육체적 고통, 강도, 강도와 다를 바 없는 군인과 경찰들, 질병, 외로움, 그리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 무엇이 그를 그런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내몰았다는 말은 적절치 않겠네요. 어떤 그리움이 그를 그 길로 소환했을까 묻는 것이 ..

소로의 후예들

나희덕, “소로에게 보내는 다섯 번째 편지,” [녹색평론]181호 (2021년 11~12월). (200~ 202쪽)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헨리 솔트라는 한 영국인은 당신의 전기를 쓰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거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헨리 솔트는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개혁 운동가이자 저술가인데요. 그는 당신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아 생태주의자, 채식주의자, 사회주의자로서 추월주의운동을 계승해나갔습니다. 그가 쓴 당신의 전기는 무려 18년 동안의 집필과 수정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당신의 삶이 이렇게 기록되고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애정 어린 노력 덕분이었지요. 헨리 솔트는 1929년 마하트마 간디에게도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물었습니다. 그 편지에..

참깨 세 근

김호석, [모든 벽은 문이다], 도서출판 선, 2016. (56~ 58쪽) 나는 초상화 작업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작업을 한다. 나는 지조와 절개를 지킨 의인, 외길로 뜻을 이룬 사람으로 존경하는 마음과 미술사적 도전 등이 아니면 붓을 들지 않는다. 먼저 진영 작업은 무엇보다 대상자에 대한 접근이 자유로워야 한다. 대상에 대한 관찰의 힘도 중요하지만 특징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대상자만의 특정 요소를 포착하는 것은 화가의 몫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삶에 투철하고 자신만만함이 없으면 모든 것을 개방하지 않는다. 화가는 인물의 겉모습보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정신과 섬세한 감정의 떨림까지 간파하고자 한다. 이런 과정이 생략된 채 과거의 사진만 가지고 작업을 하게 되면 한계가 명확하다. 다음으로 진영 ..

고독이 선율을 따라 흐르다

김미옥,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파람북, 2024. (259~262 쪽)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걸핏하면 식탁에서 소리를 지르고 폭언을 일삼았는데 이는 그에게 평생 상처로 남았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으면 내용은 서글픈데 문장에 유머가 있어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은 음식 부스러기를 바닥에 질질 흘리면서 자식들에게 식탁예절을 지키라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희극처럼 느껴진다. 카프카는 식탁에서 절망하고 식탁에서 사랑을 얻었다. 1912년 8월 20일의 일기다. 그날 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펠리체 바우어와의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다. 블라우스를 걸쳐 입은 모습이 아주 가정적으로 보였으나, 잠시 후..

실사구시 김여사

김미옥, [미오기傳],이유출판사, 2024. (13~18쪽) 유년의 집은 공장을 지나 마당이 있는 살림집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청계천이나 문래동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공장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찌꼬바’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마찌꼬바 기술자였다. 네 살부터 공장에서 놀았다. 서너 명의 공장 직원들이 일했다. 과자를 바이스에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과자 가루가 기계로 떨어져 야단을 맞았다. 나를 번쩍 들어서 마당에 데려다 놓으면 울고불고 쳐들어가니 그들이 생각한 것은 내게 공구를 들려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니퍼나 펜치를 손에 들려주면 마당 화초들의 모가지를 댕강 잘랐다. 그래서 드라이버로 바꾸니 나사만 보면 돌려댔다. 라디오고 다리미고 무섭게 해체하니 아버지는 내게서 기술자의 앞날을 보는 것 같았다. ..

온 우주와 연결되었다는 위안

이명현 장대익, [과학인생학교], 사이언스북스, 2023. (89~ 102쪽) 우주를 생각하면 아련함과 경이로움이 들다가 그 속의 존재인 인간을 생각하면 허무함과 허망함, 그리고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저도 우주와 자연을 생각할 때는 늘 경이로움에 가까운 느낌을 받지만 저 자신에 생각이 미치면 허무함이 몰려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라는 별먼지가 우주의 그 광막한 시공간의 역사를 머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내 숭고함 같은 게 느껴집니다. 나아가 제가 잔가지라는 생각에 이르면 고귀함마저 느낍니다. 제가 고립된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온 우주와 화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도 큰 위안을 줍니다. 그래도 138억 년의 역사를 가진 우주에서, 또 그토록 광..

영화를 찾아보게 하는 추천사

김혜리,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어크로스, 2018(2017 초판) 추천사를 이 정도로 짧게 설득력있게 쓰기는 어려울 것 같다. 비평가가 듣고 싶은 찬사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당신의 글을 읽기 위해서 그 작품들을 봤어요.” 내가 김혜리에게 하고 싶었으나 아직 못 한 말은 이것이다. “당신처럼 써보고 싶어서 영화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어요.” 그의 글은 다음 네 요소로 이루어진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첫째, 분석. 분석이란 본래 해체했다가 재구성하는 일이어서 작품에 상처를 입히기 십상인데 그가 우아하게 그 일을 할 때 한 편의 영화는 마치 사지가 절단되어도 웃고 다시 붙으면 더 아름다워지는 마술쇼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둘째, 인용. 그의 말이 지나치게 설득력이 있어 괜히 반대하고 싶어질 때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