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452

영혼의 진료실을 떠나보내며

알베르토 망겔, [서재를 떠나며](이종인 옮김), 더난출판사, 2018. 알베르토 망겔: 1948년생. 2018년 구텐베르크 상 수상자이자 현재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작가이자 번역가, 편집자, 국제펜클럽 회원이며, 구겐하임 펠로십과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책의 수호자’ ‘우리 시대의 몽테뉴’ ‘도서관의 돈 후안’ 등으로 불리며 명실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독서가이자 장서가로 평가받고 있다. 194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으나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이스라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십대 후반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났고, 시력을 잃어가던 그에게 4년 동안 책을 일어주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13~15쪽..

접목의 연쇄

줌파 라히리,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이승민 옮김), 마음산책, 2023. 33: 어떤 외국어이든 그 언어를 정복하려는 사람은 두 가지 주요한 문을 열어야 한다. 첫째는 독해력, 둘째는 입말이다. 중간에 놓인 더 작은 문들, 이를테면 구문, 문법, 어휘, 의미의 늬앙스, 발음도 무엇 하나 건너뛸 수 없다. 그것들을 통과하면 비교적 숙달된 수준에 도달한다. 나는 여기서 나아가 감히 글말이라는 제3의 문을 연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독해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 외국식 억양, 군데군데 약간의 발음 오류를 논의로 하면, 입말의 문도 비교적 쉽게 열린다. 단연 막강한 상대인 글말의 문은 빠금히 열려 있을 뿐이다. 36: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두 번째 은유 역시 랄라 로마노에게서 얻었다. 그의 첫 책..

환하게 빛나는 얼굴

김정현, “가장 진보적인 운동”, [녹색평론](186호), 2024년 여름호. 건강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까지 높았던 시절이 또 있었을까. 건강과 관련한 정보가 온갖 매체를 통해서 멀미가 날 만큼 매일같이 쏟아져 나온다. 건강은 좀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최종 목표가 된 것 같다. 전 세계 건강산업은 규모가 4조억 달러를 훌쩍 넘어가고 이른바 선진국들의 경상의료비는 GDP(국민총생산)의 10% 내외에 이른다. 만약 병소가 아니라 병의 원인으로 이름을 붙인다면 풍요의 질병, 오염의 질병이라고 해야 할 ’전염병‘들이 창궐하고 있다. 황폐할 뿐만 아니라 독을 가득 품고 있는 대지와 공기에 둘러싸여서, 양분이 없는 음식, 가짜 식품(초가공 식품)을 먹고 마시고, 보람을 느끼기는커녕 마음 깊은 곳에서 쓸모..

건너기

줌파 라히리,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마음산책, 2015. (11~14쪽) 난 작은 호수를 건너고 싶다. 정말 조그만 호수지만 건너편 호숫가가 내겐 너무나 아득하고 아무래도 이 호수를 건넌다는 게 내 능력 밖인 것 같다. 호수 가운데 수심은 아주 깊을 것이다. 난 수영을 할 줄 알지만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물속에 뛰어들기는 겁이 난다. 내가 말하는 호수는 외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다. 호수에 가려면 조금 걸어서 고요한 숲을 지나가야 한다. 건너편 호숫가에 오두막 한 채가 있다. 호숫가에 있는 유일한 집이다. 호수는 수천 년 전 마지막 빙하작용이 일어난 직후 형성됐다. 물은 깨끗하지만 검푸르고 흐름이 없으며 소금기가 적다. 호수 기슭에서 몇 미터만 들어가도 물속이 보이지 않는다. 아침이면 ..

휴가지에서

줌파 라히리, [내가 있는 곳](이승수 옮김), 마음산책, 2019. (111~114쪽) 머릿속을 정리하고 인근 마을에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 가을 풍경이 좋은 다리를 건너 도시 밖으로 나간다. 햇살 좋은 휴양지에 도착한다. 시스템이 마음에 든다. 조용한 호텔, 맛있는 아침 식사, 정오까지 비어 있는 수영장. 작은 흠이 하나 있다면 이곳에서도 나는 다른 사람이 하는 걸 해야 한다고 느낀다는 것. 아침 식사 때 모두들 근처 긴 오솔길, 사슴이 많은 소나무 숲, 멋진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꼭대기 레스토랑에 대해 흥분해 얘기한다. 방문해 볼 만한 유명한 여성 작가의 집도 있다. 하지만 난 기분이 내키지 않아 잠을 더 자다가 깨끗한 공기와 아이들이 뛰어들기 전의 조용한 수영을 즐..

각자의 상처

줌파 라히리, [저지대](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2014. 인도 캘커타에서 태어난 수바시와 우다얀 형제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 수바시와 우다얀 형제의 엄마인 비졸리, 두 형제의 부인이 된 가우리, 그들의 딸 벨라, 벨라의 딸 메그나. 4대에 걸쳐있는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소: 인도 캘커타 톨리건지, 미국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 미국 캘리포니아, 아일랜드 수바시: 1943년생, 쌍둥이 처럼 자란 동생 우다얀에 비해 자신은 늘 뒤처져있다는 콤플렉스가 있다. 생물학 전공으로 1969년 인도에서 미국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가서 인도로 돌아오지 않는다. 우다얀: 1945년생. 수바시 형과 동일체 처럼 자랐으나, 대학으로 가면서 서로 갈 길을 달리하게 된다. 1970..

측량할 수 없는 삶의 부분

최은영, [밝은 밤], 문학동네, 2023. (큰활자 책 438~441쪽) 내가 엄마에게 사진을 보여주자 엄마는 힐끗 보더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언니의 일이 있고 난 뒤 우리는 이 동네로 이사를 왔고, 사자 가족은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엄마는 내 머리를 감겨주었지만 엄마에게 그 일이 그저 해치워야 할 일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액자에 담고 싶은 사진은 없어?” 내가 묻자 엄마의 눈빛이 흔들렸다. 앨범이 아닌 항상 보이는 곳에 둘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 장 골라서 액자에 넣어봐.” 주제넘은 제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엄마가 언니 사진을 보이는 곳에 둔다는 것은 이제 더이상 언니에 대해 숨기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을 테니까. 엄마는 가..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신동엽, [신동엽 시전집](강형철 김윤태 엮음),창비, 2023(2013 초판)(100~104쪽) 금강 1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 소리 뿌리면서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거리며 노래 배워주던 그 양품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잘은 몰랐지만 그 무렵 그 노랜 침쟁이에게 잡혀가는 노래라 했다. 지금, 이름은 달라졌지만 정오가 되면 그 하늘 아래도 오포가 울리었다. 일 많이 한 사람 밥 많이 ..

여성주의의 대두

류대영, [새로 쓴 미국 종교사], 푸른역사, 2024.(496~502쪽) 1970년대 이후 미국 종교, 특히 기독교에 가장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은 여성주의로 대표되는 여성인권운동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주의 혹은 여성해방운동은 1960년부터 과거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는 과거 여성운동이 쟁취하기 위해서 애썼던 인권적 기본 권리들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미 법제화되어 있었다. 196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여성운동의 ‘두 번째 물결’은 사회적 경제적인 차원에서 완전한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대에 여성운동가들이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출산과 육아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 여성의 사회진출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교계는 이..

가마타고 지리산을 오르다

강정화, [산의 인문학, 지리산을 유람하다], 세창출판사, 2023.(105~111쪽)조선시대 지리산을 올랐던 대개의 선현은 요즘과 달리 평소 정기적인 운동을 하거나, 산행을 위해 체력을 비축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천왕봉에 오르고자 하는 강한 염원과 의지만으로 방안에서 글을 읽던 선비가 길을 나선 것이었다.지금이야 유람자의 의지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산행할 수 있다. 지리산과 1천 리나 떨어진 곳에서 출발해도 이틀이나 사흘이면 지리산 종주를 거뜬히 마칠 수 있다. 서울의 직장인이 금요일 퇴근 후 출발하여 주말과 휴일 동안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월요일 아침에 정상 출근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만큼 산행이 일반화되었고, 안내자 등 산행에 필요한 주변 여건 등을 갖추기가 수월해졌다.그러나 과거 선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