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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24(2014 초판).(193~ 194쪽) 에필로그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열살이었다.누군가 나를 불러앉혀놓고 자초지종을 들려준 건 아니었다. 서울로 올라온 그해, 수유리 언덕배기 집에서 나는 아무 데나 틀어박혀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거나, 오빠나 남동생과 오후 내내 오목을 두거나, 엄마가 나에게만 시키는 일인 동시에 내가 제일 싫어했던 마늘 까기나 멸치 머리 떼기 같은 일을 했고, 그러는 사이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주어들었다.오빠가 가르친 애였어요?초가을의 어느 일요일 막내고모가 식탁머리에서 아버지에게 물었다.담임을 한 건 아닌데, 작문을 해서 내라고 하면 곧잘 쓰던 애여서 기억이 나. 중흥동 집 팔고 삼각동으로 이사 가면서 복덕방에서 계약을 했는데, 내가..

가야국

2025.1.7 가야고분 ᆢ가야고분군은 1~6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 가야제국의 무덤 문화를 대표하는 7개 고분군으로 이루어진 연속유산이다. 해당 고분군들은 각 가야 중심지에 위치한 구릉에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된 가야의 최상위 지배층의 무덤들로 가야 연맹을 구성했던 각 정치체의 존재와 위세를 명확히 보여주는 유적이다.또한 고분에서 발굴된 가야식 석곽묘와 토기를 비롯한 부장품은 동일한 문화를 공유한 가야 연맹의 전체적인 지리적 범위를 알려 주고, 이들 사이의 세부적 차이는 각 구성국의 범위와 독자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등한 수준의 부장품은 가야 연맹이 자율성을 가진 수평적 관계였음을 보여준다.2023년 5월 11일 유네스코에서 가야고분군에 대해 세계유산 등재 권고가 내려져 등재가 ..

지역문화 2025.01.07

고통에 귀 기울이는 일

시그리드 누네즈, [어떻게 지내요](정소영 옮김), 엘리, 2021(2022 재판)(253쪽) 옮긴이의 말시몬 베유의 말에서 따온 ‘어떻게 지내요’라는 말은 원어인 프랑스어로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이고, 이웃에 대한 관심은 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고통의 원인을 밝히는 일이,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소설 속 일화들이 진짜 고통받는 삶의 장면이라기보다 연로한 여성 작가의 불평으로 들리기도 한다는 의구심도 있을 수 있다. 문학 작품이라면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식의 착잡함만이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준을 어떤 식으로든 담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내가 누군가의 삶을 지옥..

극한 노동의 응축, 멸치액젓

김창일, [물 만난 해양민속학자의 물고기 인문학], human & books, 2024.(121~ 127쪽)밑반찬은 물론이고 젓갈, 액젓, 분말 등 감칠맛을 내는 데에 빠뜨릴 수 없는 식재료, 우리 식탁에서 멸치의 위상을 넘는 생선이 있을까? 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맛의 주연이다. [자산어보]에서는 멸치를 추어, 멸어라 했다. ‘업신여길 멸’ 자에서 알 수 있듯 변변찮은 물고기로 여겼다. 국이나 젓갈 또는 말려서 각종 양념으로 썼다. 물고기 미끼로 사용했으며 선물용으로는 천한 물고기라고 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한 그물로 만선하는데 어민이 멸치를 즉시 말리지 못하면 썩으무로 이를 거름으로 사용한다. 건멸치는 날마다 먹는 반찬으로 삼고 회, 구이로 먹고 건조하거나 기름을 짜기도 한다’고 했다. [난..

빛과 실

한강, , 한림원 노벨문학상 수상기념 강연, 2024.12.7. (다음은 한 작가의 강연 전문. 관련 내용과 영상은 2024.12.8 한경닷컴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빛과 실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

‘정정화 지사’

김선재 임재근 정성일,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도서출판 문화의힘, 2024.(163~ 171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1묘역 313호에는 ‘한국의 잔 다르크’, ‘조자룡 같은 담력’으로 불렸던 정정화 지사가 잠들어 있습니다. 지사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여섯 차례나 식민지 조선땅에 들어와 독립운동자금을 모았습니다.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는 임정 어른들을 손수 모시며 살림을 책임지기도 했습니다. 1920년 1월 정정화 지사는 중대한 결심을 하는데요. 상해로 건너간 시아버지(김가진)와 남편(김의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마음먹습니다. 뜻을 세운 지사는 친정아버지를 찾아가 결의를 밝힙니다. “아버님, 제가 상해에 가서 시아버님을 모시면 어떨까요?”“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텐데 네가 해낼 수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