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그리빈, 메리 그리빈, 노벨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의 삶과 과학 [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김희봉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
(10~14쪽)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은 일상 생활에까지 차가운 논리를 앞세우는 전형적인 과학자는 아니었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그는 과학도 ‘인간처럼’ 했다. 그는 아무것에도 상관하지 않고 재미를 위해 과학을 했고, 기대하지 못한 모험을 즐겼다. 파인만의 물리학은 그의 인간됨에서 우러나왔고, 그의 연구 방식은 우리가 아는 여느 물리학자들과 크게 달랐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지 못한 채로 그의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만큼 그는 자기의 삶을 철저히 과학에 투영했던 것이다.
파인만은 재미를 즐기고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물리학을 사랑한 이유는 물리학이 재미있고 모험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었다. 대중들이 물리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이미지는 물리학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는 방식과 물리학자의 모습과도 관련이 있다. 파인만의 가장 큰 업적은, 과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지 보여 주고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깨는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다. 랠프 레이턴은 파인만을 ‘물리학의 샤먼’이라고 말했다. 파인만은 자연을 ‘그’ 또는 ‘그녀’로 부르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세계의 작동 방식에 접근했다. 그의 강연을 듣는 청중들은 스스로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연과 접촉하게 된다. 청중들은 자연을 다른 각도로 보게 되고, 미묘한 부분을 깨달으면서 박수를 치거나 저절로 웃음을 띠게 된다. 사람들은 파인만의 우스개 때문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 뭔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웃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것은 기억을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는지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코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파인만이 이해의 수준을 높여 준 것인데, 사람들은 어떻게 그 수준까지 올라갔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파인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파인만의 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레이턴에게 편지를 썼다. 파인만은 자신이 연구했던 과학의 특정한 주제가 아니라 그가 생각하고 살아간 방식으로 기억될 것이며, ‘현명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파인만에게는 과학보다 사랑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만큼 물리학도 사랑했다. 파인만을 개인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대화하면서 떠오른 그의 가장 큰 특성은 무엇보다도 열정이었다. 물리학에 대한 열정, 인생에 대한 열정, 드럼과 그림, 그리고 농담에 대한 열정 말이다. 자신의 일화를 랠프 레이턴과 함께 정리해서 출판한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와 [남이야 뭐라하건!]에는 과학의 초인으로서의 전설과 유명세 때문에 고통받는 파인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18~ 28쪽)
파인만은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상을 받을 만한 업적을 두 번이나 이루었다. 그는 원자폭탄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팀의 지도자로 일했다. 무엇보다도 파인만은 여러 세대의 물리학자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물리학을 생각하게 해 준 위대한 스승이었다.
아버지 멜빌 파인만은 아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과학적으로’ 생각하도록 아들을 가르쳤다. 아기가 아직 유아용 식탁 의자에 앉던 시절부터, 아버지는 여러 색깔의 욕실 타일로 아기와 함께 놀이를 했다. 처음에는 타일을 어떤 순서로든 일렬로 늘어세우는 놀이를 했고, 이것을 도미노처럼 넘어뜨리면서 놀았다. 하지만 둘은 금방 패턴을 만드는 일로 넘어갔다.예를 들어 흰 타일 둘을 놓은 다음에 파란 타일을 하나 놓고, 다시 흰 타일 둘에 파란 타일 하나, 이런 식으로 늘어세우는 것이었다. 어린 파인만은 놀이를 아주 잘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어린 파인만에게 패턴에 대해, 그리고 기초적인 수학적 관계를 생각하도록 의도적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아버지는 확실한 방식으로 과학에 대한 흥미를 아들에게 심어 주었다. 아버지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 질을 샀고, 미국자연사박물관에도 데리고 갔다. 따분한 자료와 정보조차 살아 움직이는 상상력으로 설명해서, 리처드를 마법적이고 신비로운 과학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공룡은 오래전에 멸종한 동물로 몸길이가 8미터에 머리둘레가 2미터라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써 있으면, 아버지는 읽기를 멈추고 아들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이 공룡이 우리 집 앞에 서 있다면, 공룡의 머리가 2층 창문에서 우리를 내려다볼 것이고, 머리가 너무 커서 창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지는 못할 것이다.”
아버지 멜빌은 주말마다 리처드를 데리고 숲속을 오래 거닐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가르쳐 주었다.
“ 저 새가 보이니? 저 새의 이름을 세계의 모든 나라 말로 알 수 있지. 하지만 그렇게 해도 진짜 저 새에 관해서는 하나도 알아낸 게 없어, 사람들이 저 새를 어떻게 부르는지만 아는 거야. 그러니 우리 이제 저 새가 뭘 하는지 관찰해 보자. 그게 정말로 필요해.”
리처드는 아주 어릴 적부터 무엇인가의 이름을 아는 것과 그것에 대해서 뭔가를 아는 것은 다르다는 점을 알았다. 랠프 레이턴은 파인만이 죽기 얼마 전에 “아버지에 대해서는 많이들었는데, 어머니에게서는 무엇을 배웠는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이해의 형태는 웃음이며 사람들 사이의 공감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리처드가 과학자가 되는 데 아버지 멜빌이 기여했다면, 어머니 루실도 유머 감각, 따뜻함과 공감으로 아버지와 똑같은 정도로 기여했다. 어머니의 영향이 없었다면 리처드 파인만은 관습적이고 메마른 평범한 학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금고를 열고 봉고를 두드리는 전설적인 과학자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진지한 과학과, 재미를 즐기는 감각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성취는 웃음과 인간적 공감”이라는 건전한 견해가 절묘하게 섞였기 때문에 파인만이 그렇게 특별해진 것이다.
관습에 얽매이기 싫어했던 아버지 멜빌에게도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과학에 대한 관심을 심어 주었지만, 딸에게는 그 비슷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는 멜빌 파인만처럼 열린 사람에게도 여자가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리처드의 여동생 존도 과학자가 되어서, 패서디나에 있는 유명한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우주 탐사에 참여했다. 사실 오빠가 아닌 그녀야말로 아버지가 기대했던 그런 유형의 과학자가 되었다. 존은 아버지와 오빠가 재미난 일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어깨 너머로 들었고,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들을 나중에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는 곧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여동생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청중은 한 사람뿐이었지만 파인만은 이미 10대 초반 때부터 과학 이야기꾼이었다. 존도 오빠의 발전에 도음을 주었고 자기가 ‘리처드 파인만의 첫 번째 제자’라고 즐겨 말했다.
(28~31쪽)
존은 아기때부터 오빠와 친구가 전선, 건전지 등 자질구레한 전기부품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다. 다섯 살 때 존은 오빠의 유급 실험조수로 1주일에 2센트씩 받으면서 잔심부름을 했고, 마법사의 조수 노릇도 했다. 손가락을 작은 전극 사이에 집어 넣은 채 약한 전기 충격을 참기도 했는데, 물론 오빠 친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이 일만큼 남매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일화는 없다. 오빠를 영웅처럼 우러러본 어린 여동생은 오빠가 자기를 다치게 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전기충격이 불쾌할 정도라고만 믿었다. 하지만 손가락을 떼었을 때 전극 사이에 튀는 불꽃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위협적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대신에 리처드는 동생에게 돈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경이도 주었다. 그는 여동생에게 별을 보여주었고, 물이 든 컵을 돌릴 때 원심력 때문에 컵이 뒤집어져도 물이 쏟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했다.
오빠가 보여 준 것은 존의 마음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가정의 규율은 엄격하게 서열에 따랐는데, 존이 가장 어렸기 때문에 제일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어떤 날 밤에는, 그녀가 네 살쯤이었는데, 리처드는 부모의 허락을 얻어서 동생을 깨웠다. 그는 동생에게 아주 놀라운 걸 보여 주겠다면서 근처에 있는 골프장으로 동생을 데려갔고, 골프장 한가운데 와서야 동생에게 밤하늘을 올려다보라고 말해 주었다. 거기에는 오로라가 빛나고 있었다.
존이 과학자가 된 진정한 전환점은 그녀가 열네 살 때 리처드가 프린스턴 대학원에 들어간 다음에 일어났다. 존은 오래전부터 천문학에 매력을 느꼈지만, 어머니는 여성의 두뇌는 과학에 맞지 않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다가 열네 번째 생일에 존은 오빠에게 대학교 수준의 천문학 교과서를 선물로 받았다. 동생이 저 책은 자기에게 너무 어렵다고 불평하자,오빠는 이렇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해봐. 그 다음에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서, 책 전체를 다 이해할 때까지 계속 공부하는 거야.”
용기를 얻은 존은 꾸준히 공부했다. 마침내 그녀는 407쪽에 이르러 별의 스텍트럼을 보여 주는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림 설명에는 이것을 밝혀 낸 천문학자의 이름이 나와 있었다. 체칠리아 피이네-가포시킨, 여자였다!
“비밀은 사라졌고, 여자도 과학자가 될 수 있다! 그 날부터 나는 과학에 대한 관심을 진지하게 추구할 수 있었다.”
존은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집에는 이런 흥분이 넘쳐흘렀다. 물리학을 아주 사랑했고 나는 그것을 대단하게 여겼다. 이런 흥분의 느낌은 거의 온종일 집안을 감쌌고, 오빠와 아빠가 모두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것들과 함께 자랐고, 과학은 내가 할 일이 되었다.
가족들이 과학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 특별한 일이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나중에 뒤돌아보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는 상대성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여느 가정과는 많이 갈랐던 것 같아요.“
리처드가 존에게 오로라를 보여 준 지 20년 뒤에 그녀는 고체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끝냈고, 다시 오로라에 흥미를 느꼈다. 그녀는 이 연구를 즐겼고, 오빠에게 이 연구에 대해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똑똑한 오빠가 이 문제까지 연구해서 자기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만은 싫었다. 그래서 존은 오빠에게 우주를 둘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오빠가 오로라를 연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자기는 우주의 모든 것을 오빠에게 남겨 주겠노라고. 리처드는 그러자고 했다.
(252~253쪽)
파인만은 안식년 동안 생물학과 ‘대학원생’으로 보내면서 왓슨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67년 초에 시카고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왓슨과의 친교를 다시 새롭게 다졌다. 왓슨은 이때 출판을 준비 중이던 [이중 나선]의 타자 사본을 파인만에게 주었다.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 구조를 밝힌 이 책을 파인만은 그 날로 다 읽었고, 함께 갔던 젊은 물리학자 굿스타인에게도 당장 읽으라고 죵용했다. 굿스타인이 책을 읽는 동안 파인만은 이리저리 걸어다니거나 연습장에 문제를 풀고 있었다. 동틀 무렵에 책을 다 읽은 굿스타인은 파인만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과하그이 근본적인 발전을 이루면서도 그 분야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과 완전히 접촉하지 않은 것이 놀랍다고 마랳ㅆ다.
파인만은 연습장을 보여 주었다. 온갖 낙서가 되어 있는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존경하지 말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파인만은 이것이 전체의 핵심이라고 굿스타인에게 말했다. 파인만은 바로 이것을 잊고 있었고, 이것 때문에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파인만이나 왓슨처럼 돌파구를 여는 연구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무얼 하는지 잊어버려야 하고, 자기만의 밭을 갈아야 하는 것이다. 파인만이 왓슨에게 보낸 편지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문헌보존소에 있는데,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은 과학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묘사했습니다. 나도 압니다. 나 자신도 그 부들부들 떨리도록 아름다운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왓슨이 묘사한 것은 평범한 과학자의 방법이 아니라, 새로운 통찰로 중요한 도랖구를 여는 드문 개인들의 방법을 쓴 것이었다. 왓슨 자신도 ‘부들부들 떨리도록 아름다운 경험’을 해 보았고, 그 일로 노벨상을 받았다. 이런 비범한 성취는 거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디랙조차도 이런 일을 겨우 두 번 달성했는데, 하나는 자기 방식의양자역학이었고, 또 하나는 전자방정식이었다. 그러나 파인만이 왓슨에게 편지를 쓸 때는 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아름다운 경험을 이미 세 번이나 겪을 뒤였다. 양자전기역학, 초유체, 약한 상호 작용(그의 기준으로는 최상의 것)이 그런 경험이었다. 그는 이제 다시 한 번 이런 일을 경험하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과학 논문을 따라가거나 다른 사람의 이론과 경쟁하는 일을 그만두고 자기의 뿌리로 돌아가서, 이론을 실험과 비교하고, 자기만의 추측을 하면서 1970년대의 입자물리학에 거대한 발전을 가져올 통찰을 끌어 냈다. 그는 진정 노벨상을 넘어서 최상급 이론물리학자의 삶을 펼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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